강우규, 1855~1920
출생
1855년 조선 평안도 덕천 제남에서 아버지 강재장과 어머니
배경
한의사 출신 독립운동가. 어려서부터 한의학을 공부해서 한의사로서 어려운사람들에게 무료로 진료를 봐주고 한편으로 어린아이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치는 등 기부하는 삶을 살아온 학자이다. 1905년(광무8년, 고종41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면서 점차 국운이 기울어감을 느끼던 강우규는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도모했지만,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조선의 국권이 일제로 넘어감에 따라 식민지가 되어버리면서 크게 분노하여 국권을 회복시킬 명분으로 만주로 가서 한약방을 경영하는 한편에 조선인들의 마을을 건설하게끔 해 독립군들의 주요 거점지역이 되게끔 성장시킨다.
영명학교, 광동학교를 세워 교육에도 전념시켜 독립의지를 고취시키고,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일어나게 됨에 따라 블라디보스토크 노인단 지린성 지부장이 되어서 조선총독부 총독을 암살하기로 결심하여 폭탄을 구해 경성으로 잠입한다.
1919년 9월, 당시 조선총독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1850~1924)의 후임 총독으로 사이토 마코토(1858~1936)가 임명된다는 소식을 듣고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하기위해 폭탄을 던졌지만 빗나가버려서 암살을 하진 못한다. 그렇게 의거 후 도망다니지만 결국 친일파 김태석(1882~?)에게 체포되면서 수감 후 1920년 11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한다.
한의사의 꿈
일찍이 형으로부터 한의학을 배워 성인이 되어 한약방을 세워 재물을 모으게 되는데, 만50세가 되던 1905년(광무8년, 고종41년)에 을사오적* 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하게끔 함으로서 급속도로 국운이 기울어지는 것을 스스로 목격한다.
생몰년도 | 직책 | |
박제순 | 1858 ~ 1916 | 외부대신 |
이지용 | 1870 ~ 1928 | 내부대신 |
이근택 | 1865 ~ 1919 | 군부대신 |
이완용 | 1858 ~ 1926 | 학부대신 |
권중현 | 1854 ~ 1934 | 농상공부대신 |
그렇게 만주로 넘어가서 독립운동가들과 규합하여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모의하기 시작한다. 1908년 신민회 간부로서 영명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을 고취시키고자 하지만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넘어가게 되면서 강우규는 가족들을 러시아 제국으로 이주시키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해 지린성으로 가서 터를 잡은다음 한약방을 차려 재물을 모으면서 몰려온 조선인들이 터를잡고 살 마을을 조성하고 이 마을을 신흥동이라고 했다. 이 신흥동에서 광동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한 다음 스스로 학생들을 가르쳐 이미 나라는 빼앗긴 조선이지만 이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교육적으로 성숙한 국민들이 되게끔 만들고, 동시에 독립자금 조달을 집중적으로 받기 위해 '노인단'에 가입하게 된다.
조선총독 잡으러
1919년 3월 1일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남에 따라 신흥동 경영과 광동학교 교장직등을 다른 사람에게 넘긴 이후에 강우규는 '노인단' 지린성 지부장으로서 조선총독부 총독 암살에 앞장서게 된다. 그렇게 의거에 쓰일 폭탄을 가지고 1919년 6월 조선땅으로 들어와 8월경에 경성에 당도한다.
당시 조선총독부 총독은 하세가와 요시미치(1850~1924)였는데, 곧 경질되고 후임 총독으로 사이토 마코토(1858~1936)가 내정되었는데 새 총독이 9월에 오는 것으로 확정이 남면서 강우규는 의거에 돌입하기위한 사전작업들을 거치면서 준비하기에 이른다.
거사는 1919년 9월 2일 열리게 되는데, 당시 나이 64세의 노인이였던 강우규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기차를 타고 역에 내린다는 소식을 듣고 내리기만을 기다렸다가 사이토 총독이 기차에서 하차하고 이동수단을 갈아타려는 순간에 폭탄을 던지는데, 빗겨나가게 되면서 오히려 구경나왔던 관중들이 크게 다치고 만다. 사이토 총독은 파편 몇조각이 튀는 경상을 입는데 그치고 만다.
최후
그러나 이 폭탄 의거로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서 즉시 빠져나간 강우규는 여러 장소를 변경해가며 포위망을 벗어나지만 2주일정도 지난 후 친일 경찰인 김태석(1882~?) 경부에게 체포당하고 마는데, 이듬해 1920년 초 경성 법원에서 강우규에 대한 사형 선고가 확정남에 강우규는 불복하고 항소하지만 기각되면서 사형이 확정나버리고 1921년이 되기 한달전인 1920년 11월 말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면서 순국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