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봉창

Mintaka5 2025. 1. 5.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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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1900~1932

이봉창,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900년 대한제국 한성부 용산방 서동문외계에서 아버지 이진규와 어머니 밀양 손씨 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일제강점기(1910~1945) 당시 한인애국단 소속의 독립운동가로서 당시 일본 천황 히로히토(쇼와 덴노, 1901~1989, 재위1926~1989)에게 폭탄 의거를 시도했던 인물. 조선인을 차별하는 일제에 대해 항일의식을 지니고있던 청년으로서 성인이 되어 일본 본토로 건너가 막노동을 하며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고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중화민국 상해로 1930년 가서 김구(1876~1949)를 만난다. 

김구는 이봉창을 한인애국단에 가입시키고 이봉창의 항일의지를 수용하여 당시 일본 천황 히로히토를 폭탄으로 폭살시키겠다는 계획을 추진하여 1932년 이봉창을 일제 수도 동경(도쿄)으로 보낸다. 

관병식을 끝내고 지나가던 천황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지만 명중에는 실패하고 체포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순국한다. 

 

 

초년

천도교 재단 학교였던 용산 문창보통학교를 다니지만 가세가 점점 기울게 되면서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바로 생계에 뛰어들어 1913년부터 알바를 시작하면서 생계를 위한 벌이를 시작하게 된다. 몇년간 그렇게 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돈을 벌다가 1919년 잘리고 1924년까지 용산역 철도 역부를 지내면서 일을 하는데, 자기보다 더 늦게 들어온 일본인 노동자가 더 많은 임금을 받게되는 일, 아무리 일을 잘해도 조선인인 이유로 승진이 늦어지고 임금이 오르지 않는등의 일을 목격하며 조선인 노동자에대한 임금차별에 분노한 이봉창은 즉각 항의하지만 역시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암울한 현실에 1924년 사직하게 된다. 이 일로인해 이봉창은 항일의식이 싹트게 된다. 

그렇게 사직후 1년넘게 직업을 가지지 못하고(당시 실업률이 어마무시했음) 금정청년회라는 청년단체 들어가 활동을 하는데 나름 조용하게 활동하던 단체라 당시 널리 있던 청년단체들은 대부분 항일성격을 띤 단체라 제약이 많았지만 금정청년회는 보통의 인격수양과 교육정신고취등을 추구했기에 별 일이 없었다고 한다.

 

조선인 차별

그렇게 1925년 간이국세조사에서 일하게 되는데, 금정청년회와 철도 역부를 하면서 일본인들로부터 인정받아서 추천받아서 된 것이였다. 일도 잘해서 일제로부터 포상을 받는등 일제에 협조적인 측면이 없지않아 있었다. 그리고는 일본 본토에 가면 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1925년 11월 일본행 배를 타고 오사카에 도착하지만 이야기 듣던 것과 다르게 일본 본토에서도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만연했고 겨우 구한 일자리에서도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면서 현실을 느껴 좌절감을 느끼는데..

하필 1928년 11월 교토에서 열린 일본 천황 히로히토(쇼와 덴노, 1901~1989, 재위1926~1989)의 즉위식을 구경했다가 갑자기 체포되어 유치장에 수감되는 일이 벌어지는데 하필 이봉창은 일본 본토에와서 취직을 하기위해 조선이름/일본이름을 썼고, 그렇게 쓰인 편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잡아갔고 일본인은 하루만에 풀려났는데 자신은 조선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열흘넘게 감금되어있다가 풀려난다. 이 이후에 이봉창은 식민지인과 일본인이라는 사이에서 방황하고 현실에 좌절하게 되면서 상당기간 방황하게 된다. 

 

임시정부

1930년 11월 여전히 일자리를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이봉창은 처음 왔던 오사카로 다시 돌아와있을 때 누군가로부터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조선인들을 돌봐주고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출발하여 상해에 도착한다. 가자마자 일자리를 구하고자 했지만 이봉창은 중국어를 구사할 능력이 없었고 아무런 연고도 없던 상해에서 일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이봉창은 일본에서 들었던 소식을 따라 임시정부를 찾아가게 되는데, 처음엔 임시정부 관계자들도 밀정이란 의심을 해 쫓아내는등 여러 소란이 있었는데 이 소란을 들은 김구(1876~1949)가 이봉창을 만나 탐색해본 결과 이봉창의 경험과 일본어구사능력, 천황 히로히토의 행사에 가본 경험등을 높게 사고 이봉창은 여태까지 쌓인 울분과 가지고있던 항일정신등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가 다시 차오르게 된다.

 

의거

I. 준비

그렇게 이봉창은 거사를 위해 김구와 점조직형태로 직접 보고하고 평상시에는 일반사람들처럼 일하면서 생활비 벌고 일본인행세를 하면서 생활하는데, 1여년간의 철저한 거사준비를 거치게 된다. 1931년 하반기즈음까지 김구와 이봉창은 각자 거사준비에 만연한 준비과정을 거치게 된다.

 

II. 의거실행

그렇게 1931년 12월 거사준비가 완료되고 이봉창은 당시 한인애국단 본부였던 안공근(안중근의 동생, 1889~1939)의 집에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선서를 마친뒤에, 김구는 이봉창에게 현금과 거사에 필요한 물품들을 지급하고 이봉창은 몸에 폭탄을 숨기고 천황이 있는 일본본토 수도 도쿄에 다다르게 된다. 

1932년 1월 8일 일제 육군 관병식 행사에 천황 히로히토(쇼와 덴노, 1901~1989, 재위1926~1989)가 만주국 황제 푸이(1906~1967, 청재위1908~1912, 만주국재위1932~1945)와 함께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사일을 이날로 정하게 된다. 

그렇게 히로히토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던 때, 수류탄을 투척하지만 명중에 실패하고 생각보다 약한 화력에 거사는 실패로 끝나고 이봉창은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의거장소가 사쿠라다몬 부근이여서 이봉창의 폭탄 의거를 사쿠라다몬 의거라고 불린다.

 

III. 순국

이 의거이후 수개월동안 심문을 받고 1932년 하반기에 열린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일본 도쿄 치요다구에 있는 이치가야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한다. 1932년 10월 10일, 만3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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