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안중근

Mintaka5 2024. 12. 24.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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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1879~1910

안중근 의사,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879년(고종15년) 조선 황해도 해주부에서 아버지 안태훈(1862~1905)과 어머니 조마리아(1862~1927)사이에서 3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남. 

 

배경

대한의군 참모중장.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역사에서 독립운동가, 민족지도자로 널리 알려져있는 인물. 어린시절부터 천주교에 자연스레 노출되었던 집안으로 안중근 본인도 천주교 학교에 입학해 신학을 배우고 세례를 받는등 신실한 신자가 된다. 1905년 러일전쟁 일제의 승리이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암울한 조선의 현실에 국권 회복을 위한 계몽운동과 항일 의병운동, 국채보상운동등에 적극 호응해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인해 광무제 고종(1852~1919, 조선재위1864~1897, 대한제국재위1897~1907)이 폐위되고 융희제 순종(1874~1926, 재위1907~1910)이 즉위함에 따라 이에 본격적인 항일 의병투쟁에 나서 의병을 일으키는데 가담하는 일에 참여한다. 이후 연해주로 가서 의병운동을 일으키고,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 러시아제국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계동청년회에 가입, 1908년 전제덕()의 휘하에 대한의군 참모중장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사령관이 되어 엄인섭(1875~1936)과 의형제를 맺고 부하를 이끌고 일제 수비대를 기습공격해 전멸 시키는등 전공을 올리지만, 이후 일제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 석방해준일로 일제의 기습공격을 받기전 무리한 공격을 주장해 나갔다 패배해 신임을 잃어 이후 부대가 해체된다.

1909년(융희2년), 같은 뜻을 가진 11인과 동의단지회를 결성해 의병을 일으키고자 애를쓰는데,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암살하기위해 자원하여 가서 반자동권총으로 암살에 성공한다.

 

초년

할아버지 안인수(1832~1893)가 400평대의 토지를 가진 대지주이자 미곡상으로서 많은 재산을 축적한 것에 안중근의 초년은 비교적 어렵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점점 일제의 조선에 대한 만행이 거세짐에 따라 점차 기울게 된다. 1884년(고종20년)갑신정변 이후 개화당으로서 아버지 안태훈이 척신들에 의해 죽을 위기에 놓이면서 이사를 해 조용히 서당을 세워 아들 안중근의 교육을 초빙한 훈장을 통해 시킨다. 1894년(고종30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남에 따라 아버지 안태훈은 안중근과 함께 동학군 토벌에 참가하기도 한다.

천주교 신자이기도 한데, 아버지 안태훈을 따라 천주교에 입교해 도마라는 세례명을 받고 니콜라 조제프 빌렐렘 신부(한국명 홍석구, 1860~1938)로부터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 

 

청나라 의사

1904년(광무7년, 고종40년) 아버지 안태훈이 병을 치료하기위해 청나라 의사 서원훈(?~?)을 찾아갔는데 서원훈이 원인모를 이유로 안태훈을 구타하였는데 이에 안태훈은 일단 화해를 청하고 그대로 나왔는데 이 소식을 알게된 안중근이 10여명을 이끌고 서원훈을 잡아 길거리에서 걷지못할 정도로 구타를해 청나라 국민들여러명이 또 연루되면서 자칫 외교적 분쟁으로 발전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후에 문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어서 넘어갈까 한다.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사조약, 1905)이 체결되면서 안중근은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위해 상해로 간다. 그러나 천주교 신부들과 세력가들의 협조가 거절당하게 되면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는데, 아버지 안태훈(1862~1905)이 갑작스럽게 병으로 사망하면서 3년상을 치른다음 평안도로 이사와서 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고 재산을 털어 삼흥학교를 설립하여 계몽적 교육운동을 시작하고, 이후 돈의학교를 인수해 안중근 스스로도 교사로서 후학들을 가르친다. 

1907년 대구에서 김광제(1866~1920), 서상돈(1850~1913), 윤필오(1860~1924)의 주도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경제적으로 예속되지 않고자 1300만원의 차관을 국민들이 갚아서 국권을 지키고자하는 운동인데,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안중근역시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해 국채보상기성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실패로 끝나버리고 만다. 

 

의병

1907년(광무10년, 고종43년) 고종 황제가 헤이그 특사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일제로부터 강제퇴위를 당한 이후 정미칠적들이 한일신협약이 체결됨에 따라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이 됨에 따라 조선 전국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되면서 안중근은 의병을 일으키는데 가담하게 된다. 이후 러시아제국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의병활동을 위해 계동청년회에 가입한다. 

이후 1908년 전제덕(?~?)의 휘하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사령관으로서 엄인섭(1875~1936)과 의병을 이끌고 가서 일제 수비대를 전멸시키는데 성공하지만 이후 일제의 기습공격으로 패배해버리면서 안중근의 판단에 신임을 잃은 의병들이 안중근을 신임하지 않게 되면서 부대가 해체됨에 따라 다시 이동한다. 

1909년(융희2년) 안중근은 동의단지회를 결성해 의병을 다시 일으키기고자 한다. 

 

 

이토 히로부미

1909년 10월 26일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와 러시아제국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1853~1943)가 회담을 하기 위해 하얼빈에 만나기로 한 소식을 안중근이 접하게 된다. 이에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자원한 안중근이 동지 우덕순(1876~1950), 조도선(1879~?), 유동하(1892~1918)등과 함께 하얼빈에 도착하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와 코콥초프는 기차안에서 회담을 가지고 러시아제국 군대의 사열을 받기위해 기차에서 내리는데, 안중근은 사열을 끝낸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쏴서 암살하는데 성공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된다.

하얼빈이 러시아 제국령이라 러시아제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끔 해 측근 러시아 변호사를 준비하는것까지 좋았지만, 일제에 넘겨지게 됨에 따라 뤼순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3월 26일 처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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