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안창호

Mintaka5 2025. 1. 4.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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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1878~1938

안창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878년 조선 평안도 강서군 초리면에서 아버지 안흥국과 어머니 제안 황씨 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포함해 여러 단체를 통해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의 대표인물이자 민중의 계몽을 꾀한 교육자. 미국으로 건너가서도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고학생활을 하면서도 공립협회 창립, 이는 이후 한인자치단체로 발전하고 귀국후 신민회, 대성학교 설립과 서북학회를 창립하는등 대한제국의 청년들이 조국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켜 주기위해 사방팔방으로 연설을 하고 활동을 한다.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이후 안창호는 더욱 국가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한층 더 힘이 실려 실력양성운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에 기여하게끔 한다. 1919년부턴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직책을 맡기도 하고 이후 1920년대에 들어 이승만, 김구등과 대립하여 반대활동을 전개함에 따라 1930년 임시정부 여당인 한독당(한국독립당)을 결성하여 민족주의 세력을 규합해 초대 이사장에 이동녕, 안창호 본인은 이시영, 김구등과 이사를 맡게 된다. 

그러나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해 훙커우공원 폭탄 의거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경성으로옮겨지게 된다. 실형살이를 하다가 1935년 가출옥하고 은거하지만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에 다시 체포되어 당해 말 병보석으로 석방되지만 1938년 병으로 사망.

 

초년

1895년 장로회 계통의 교육기관 경신학교(언더우드가 설립)에 입학하면서 학문을 배우고 1896년 민족 계몽단체인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지만 1898년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함에 따라 고종 황제의 칙령에 따라 독립협회가 해산됨에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서 교육자로서의 길을 가고자 점진학교를 세운다.

 

미국행

1902년 아내가되는 이혜련(1884~1969)과 혼인한 후 모든 일을 접고 같이 미국 유학행을 떠난다. 배를타고 수개월간의 항해 끝에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시에 도착하게 되는데, 미국으로 와서 일을 병행하면서 1903년 미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하면서 한인친목회를 조직하고 유학생 신분으로서 모범을 보여 많은 교포들이 가입하게되고 교민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1905년(광무8년) 을사늑약이 체결됨에 따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제에 의해 넘어가게 되면서 반대운동을 주도하고 대한제국에 귀국해 애국 계몽운동과 더불어 민족 운동을 통해 실력이 있어야 독립을 할 수 있다는 일념하게 교육의 필요성을 더욱 통감하여 이에 몸소 실천하고 투신한다.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로 완전히 넘어감에 따라 안창호는 교육으로서 계몽하겠다는 뜻을 더욱 확고하게 전개하기위해 다시 이듬해 미국으로 떠난다. 8년간의 활동으로는 흥사단을 설립해 직접, 간접적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하면서 국외에서도 항일 독립운동을 진행하였고 1919년 다시 돌아왔을 땐 3.1운동이 일어난 후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설립됨에 따라 내무총장에 임명된다. 

 

이승만

임시정부 내무총장직을 수행할 당시 임시정부에 없던 직함을 쓰던 대통령으로 활동하던 이승만(1875~1965)에게 헌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지말라고하고 이승만은 독립운동때문에 이리하는것이니 간섭하지말라는 것으로 일축한다. 그러나 파리 강화 회의(1919~1920)에서 독립 청원권을 주장하기위해 이승만과 정한경을 파견 대표로 정해졌는데,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 재임1913~1921)역시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는데 이들이 한국을 위임통치 할 것을 요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서 이승만 반대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안창호 역시 이승만과 반대편에서서 암투를 벌이는데, 결국 이승만은 탄핵당하지만 이승만을 옹호했던 김구(1876~1949)는 안창호측과 또 대립하게되며 갈등하게 된다.

1926년부터 안창호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를 모두 통합한 대독립당운동(좌우합작)에 앞장서게 되는데, 각 파간의 이견이 너무 심하게 벌어지는바람에 대독립당운동은 사실상 중단되어버리는데, 1928년부터 한독당을 중심으로 해서 다시 운동을 실현시키고자 하지만 1932년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이탈세력이 늘어남에 따라 분해되고 만다.

 

훙커우 공원

1932년 윤봉길(1908~1932)의사가 상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의거에 성공함에 따라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모든 관계요인들에게 대피를 지시하지만 안창호는 연락을 받지 못해서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폭탄의거 관련자로 지목됨에 따라 체포되어 일제 경찰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경성으로 호송되면서 자신은 전혀 상관없다고 주장하지만 4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일제 간수들에 의해 혹독한 괴롭힘과 위생문제, 건강문제등으로 점점 건강이 나빠져 1935년 병이 악화되어 병보석을 신청함에 따라 동지인 윤치호(1865~1945), 김성수(1891~1955), 이광수(1892~1950)등이 보석금을 지불해서 가석방되게 된다. 그렇게 풀려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교육에 다시 매진하여 가르침에 매진하며 이상촌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며 시간을 보내지만 다시 안창호에게 사건이 터진다.

 

 

수양동우회 사건

교육, 계몽적 단체인 동우회는 1929년 흥사단과 수양동우회가 통합되어 동우회로 개칭이 된다. 1937년 5월, 중일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일제는 전쟁 체제를 조성하기위해 지식인, 중산층계열 집단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들을 수사하면서 1937년부터 1938년까지 180여명의 동우회 회원들에게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잡아들여 강제로 전향을 시키는 등 일제에 협력하게끔 사실상 협박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변절자가 꽤 나오게 되는데, 함께 조직을 운영하던 이광수(1892~1950), 주요한(1900~1979)등이 친일파로 변절하게 된다. 일제는 이 과정을 통해 동우회의 자산을 모두 국방헌금이라는 형태로 모두 회수한다.

안창호는 동우회 지도자격 인물로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다시 수감되어 고문을 당하는등 고통을 받는다. 윤치호와 김성수등은 보석금을 제출하게끔 해  1937년 11월 병보석으로 석방하게 되지만 병세가 이전보다 더 심각해진다. 이전에 좋지않았던 건강에 고문 후유증까지 겹치게 되면서 합병증이 발생하여 고통받다가 1938년 3월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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