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1908~1932
출생
1908년 대한제국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서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 사이에서 태어남. 호는 매헌.
배경
한인애국단 소속의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1910~1945)시기 1932년 상해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의거를 전개했다. 이 의거로 일제의 잔혹무도한 식민통치에 고통받고 있던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다시금 일깨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활기를 불어일으킨다.
의거 후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심한 구타와 고문으로 취조, 심문당하면서도 절개를 잊지않고 반드시 대한인은 각성하여 독립할 것이며 일제를 포함한 제국주의 열강들도 필패할 것이다 라고 응수했다.
그렇게 1932년 5월, 기소되어 검찰로 송치되고 3주뒤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2월 일본 가나자와 미고우시 공병 작업장에서 총살형을 당하며 만24세의 나이로 순국한다.
초년
어릴때 한학을 배우다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서 수학한다. 그러나 1919년 3월 1일 3.1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어린 혈기에 일제의 노예교육을 받는 것과 일본어를 배우는 것에 강한 반감을 느껴 학교를 자퇴하고 다시 한학을 수학하러 간다. 문장에도 뛰어났고 역사에도 능통하여 이시기에 민족적 문제에 접근하게 된다.
청년
I. 매헌
18세가 되던 1926년, 스승이였던 매곡 성주록()이 더이상 윤봉길에게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여 하산을 시킬 때 자신의 아명 매곡에서 한글자를 취해 '매헌'이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매헌은 윤봉길의 호이다.
II. 활동
그렇게 하산한 윤봉길은 농촌부흥, 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농민에 관한책을 저술하고 여러 강연들을 개최하여 농촌계몽에서 점점 민족적 계몽운동적 성향으로 사고가 확장되게 된다. 1929년 월진회라는 농민운동단체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이 되어 농민적 통합을 통해 공동체를 형성하고, 야학을 장려해 문맹률을 줄여 애국사상을 고취시키는등의 활동을 한다.
이러한 행위를 일제에서는 불온한 마음을 품고있는건 아닌지 의심을 하여 윤봉길을 매번 불러 조사를 하게 된다.
III. 뜻
윤봉길은 '장부출가생불환'이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하게 중화민국으로 떠난다. 장부출가생불환은 "사내 대장부가 집을 나서면 뜻을 이루기 전까지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말로서 윤봉길의 확고한 의지를 나타내는 문장이다. 그렇게 중화민국으로 건너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인 김구(1876~1949)를 찾아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뜻을 내비치게 된다. 그렇게 윤봉길은 김구가 주도하는 청년독립운동단체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게 된다.
폭탄 의거
I. 만보산사건
1931년 7월 만보산사건이 발생한다. 일제는 한-중간 민족분쟁을 부추겨 만보산지역(중국 만주 지린성 장춘시)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농민들간에 수로로 문제가 발생한 것이 발단이 되어 유혈충돌이 유도됨에 따라 일제군이 개입하게 되면서 9월 18일 만주사변이 촉발된다. 그렇게 1932년 3월1일 일제는 결국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설치하여 지배하게 된다.
II. 의거
1932년 김구가 윤봉길에게 4월 29일 상해 훙커우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 히로히토(쇼와 덴노, 1901~1989, 재위1926~1989)의 생일연과 전승기념행사에 폭탄을 투척해 행사를 무산시키고 일제 군 수뇌부들에게 타격을 입힐 거사준비를 하게 된다.
특히 윤봉길이 지참할 폭탄은 위장을 위해 도시락과 물통모양으로 제작하게 되는데, 마침 4월 29일 당일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도시락을 지참시키게끔 해서 계획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일본인 신분으로 위장해 훙커우공원에 들어간 이후 행사가 시작되고 군수뇌부들과 내빈들이 자리에 앉고 축하연이 펼쳐지고 묵념을 하는 틈에 도시락 폭탄을 던져 그들이 앉아있는 단상에 정확하게 명중하여 폭발하게 된다. 그렇게 상해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1869~1932)와 상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1874~1932)가 사망하고 수많은 군수뇌부들과 내빈들이 중상을 입게된다. 그러나 자폭용으로 들고온 다른 하나의 폭탄이 불발되면서 일제 헌병들에의해 제압, 체포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1932년 5월 25일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순국
그렇게 일제는 김구(1876~1949)를 잡기위해 윤봉길에게 모진 고문을 가하지만 끝까지 입을 다물었고 1932년 11월 배에 실려 일본 본토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작업장에서 총살로 순국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