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Wonik, 1547~1634
대수 | 재임기간 | 군주 | |
영의정 재임 | 85 | 1598. 11 ~ 1599. 07 | *선조31년 ~ 선조 32년 |
87 | 1599. 11 ~ 1600. 02 | 선조32년 ~ 선조 33년 | |
94 | 1608. 03 ~ 1609. 09 | *광해군 원년 ~ 광해군1년 | |
96 | 1611. 09 ~ 1612. 07 | 광해군3년 ~ 광해군4년 | |
101 | 1623. 04 ~ 1627.01 | 인조 원년 ~ 인조4년 |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 광해군(1575~1641, 재위1608~1623)
출생
1547년 조선 경기도 금천현 서면(현 경기도 광명시)에서 아버지 이억재(1503~1585)와 어머니 동래 정씨 사이에서 태어남. 아버지 이억재는 왕실 종친으로 종2품 하계 정의대부에 봉해진인물. 이원익은 전주 이씨 왕실 종친으로 태종(1367~1422, 재위1400~1418)의 서자 익녕군(1422~1464)의 4대손이다.
배경
왕족이자 영의정을 역임한 조선 중기 중신으로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거치며 전란의 조선을 구하기위해 힘쓴 인물. 평양성 전투등에서 광해군과 더불어 최대한 왜군들을 막아낸 인물. 다섯 차례나 영의정에 오른 인물로 성품이 곧고 청빈한 삶을 추구해 양사대간들에게도 존경의 대상인 재상.
관직 진출
1564년(명종19년) 17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해 생원, 그뒤에 양반가문출신으로 음서로 관직에 진출한다. 음서로 진출한 이후에도 진사시, 1569년(선조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비로소 제대로 관직생활을 하게 된다. 승문원(외교부 격)에 들어가서 일을 시작한다. 아래표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원익이 오른 관직과 그 품계를 정리한 표.
직급 | 품계 | |
1569 | 승문원 정자 (외교문서 검토, 교정담당관) | 종7품 |
1573 | 성균관 전적 (유생 교육 전담사) | 정6품 |
1574 | 예조정랑(예의, 제사, 연회, 교육, 과거담당) | 정5품 |
1576 | 사간원 정언 (국왕에 대한 간쟁, 탄핵, 인담당) | 정6품 |
1578 | 홍문관 교리, 홍문관 부응교(행정, 연구) | 정5품, 종4품 |
1583 | 우부승지 (왕명출납, 육조업무 분장) | 정3품 |
1587 | 안주목사 (목사 : 광역시 시장급) | 정3품 |
임진왜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되면서 정2품 이조판서(행안부장관 격)와 평안도 도순찰사(정2품 군사직함)를 겸임해서 선조의 피란길을 터놓는 임무를 맡게 된다. 1592년 광해군, 윤두수, 김명원과 함께 평양성을 최대한 지키면서 선조의 피난시간을 벌어주는 작전에도 투입되지만 결국 평양성함락. 함락 이후 이덕형(1561~1613)을 사신으로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여 조선을 구명하기위해 온 명나라군과 함께 2차례에 걸쳐 명군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하지만 왜군에의해 패배한다.
2번의 실패끝에 4번째 평양성 전투인 1593년 류성룡(1542~1607)과 이여송(1549~1598)과 함께 합세해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평양성을 탈환한 공로로 이원익은 종1품 숭정대부에 봉해지게 된다. 이 이후에도 이원익은 1595년 우의정이 됨과 동시에 도체찰사(정승이 겸직하는 전시 군사사령탑 직함)로서 영남체찰사영에서 일하며 당시 영남지역의 의병장 곽재우(1552~1617), 임계영(1528~1597)등과 교류하면서 지원, 이순신(1545~1598)과도 교류하였다.
1598년 명나라 대신 정응태가(?~?) 조선을 무고하여 명황제 만력제(1563~1620, 재위1572~1620)가 오해하는 사건이벌어지면서, 조정에서 3회에 걸쳐 진주변무사를 파견해 이를 해명하고자 했다. 이원익은2회차 진주변무사로 가서 해명 업무를 본다. 충실히 잘 해명한 덕분에 원만하게 해결되었고 무고했던 정응태는 파직되고 관직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원익은 진주변무사의 공으로 1598년 11월 영의정에 오른다.
왜란이후
1598년 12월 긴7년간의 왜란이 끝나고 이원익은 북인 이이첨(1560~1623)일당이 영의정 류성룡을 부정축재자(당시 청백리 재상: 류성룡, 이원익... 그러나 정응태무고사건때 정응태가 양호를 탄핵함으로서 양호가 울산성전투를 승전으로 허위보고하는바람에..)로 몰아 공격해 스스로 사임하게하는 일에 분개해 병을 이유로 사직해버리는데, 이후 영의정에 복직되고 여러 관직을 왔다갔다 거치면서(앞으로 영의정 3번더함)전란이후 조선을 정비하기위한 노력에 몰두한다.
광해군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1575~1641, 재위1608~1623)이 즉위하면서도 다시 영의정에 올라 대동법(세금, 재정제도)을 실시하여 재정확보에도 힘을쏟는데, 이후 광해군이 난폭해지면서도 직언을 서슴치않고 하지만 임해군(광해군의 형, 1572~1609)이 처형되면서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1611년 한차례 더 영의정이 되나 사직하고, 인조반정이 올때까지 잠수.
인조반정과 후학양성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1595~1649, 재위1623~1649)가 즉위하는데 인조는 이원익을 불러 다시 영의정으로 앉힌다. 마지막 영의정 재임기간(1623~1627)으로서 재임기간 당시 나이가 70대 후반이였으니 상당한 고령이여서 1627년 80세가 되던 해 사직을 하고 고향으로 가서 재차 부름을 받아도 응하지 않고, 이때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으로 여생을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문하생이 나온다.
생몰년도 | 비고 | |
허목 | 1596~1682 | 남인, 대학자 |
윤휴 | 1617~1680 | 1680년 경신환국으로 사사 |
이민구 | 1589~1670 | 도승지, 병자호란의 책임으로 유배, 1649년에 풀려나 예조참판까지 지냄 |
1634년 87세라는 현재로서도 고령인 나이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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