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급 귀족 & 관리/조선

86대 영의정 윤두수

Mintaka5 2024. 9. 22.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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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 Doo-su, 1533~1601, 영의정재임1599(2개월)

윤두수,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533년 조선 한성부에서 아버지 윤변(1493~1549)과 어머니 성주 현씨 사이에서 태어남. 동생으론 같은 서인인 문신 윤근수(1537~1616)이 있다. 

 

배경

조선중기 문신으로서, 종계변무의 공과 더불어 임진왜란&정유재란(1592~1598)기간동안 서인의 영수로서 류성룡(1542~1607)등과 함께 전란을 수습하는 중책을 맡으면서 조선을 위기로부터 벗어나기위해 고군분투한 고위급 대신이다. 7년간의 전쟁이후 영의정으로서 전란을 수습하는데 애쓰지만, 양사 대간들의 탄핵으로 2달만에 물러난 인물.

 

영혼의단짝

일찍이 아버지 윤변을 16살인 1549년에 잃고 성수침(조광조의 제자, 1493~1564)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성수침의 아들 성혼(1535~1598)을 만나게 된다. 성혼과 평생을 친구로 지내면서 이후 김효원과 심의겸에 의해 붕당이 형성될 때 서인을 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558년(명종13년) 문과 을과7위로 급제해서 승문원(외교문서 담당 관청)에 들어간다. 

수많은 직급들을 오가면서 1565년엔 영의정 윤원형(1509~1565)과 우의정 심통원()등의 등의 외척세력들을 탄핵시켜 몰락시킨것 또한 윤두수였다. 이후로도 직급에 오름에 따라 여러 탄핵을 받지만 명종, 선조가 무마시키는등 운도 작용하는 케이스. 

 

종계변무

조선이 1392년에 건국된 후 명나라에 책봉교서를 받으러 갔던 정도전일행이 명 초대황제 주원장(홍무제, 1328~1398, 재위1368~1398)이 고려 권신 이인임(1312~1388)이 이성계의 아버지이고 이인임은 공민왕(1330~1374, 재위1351~1374)을 시해하고, 아들인 이성계(1335~1408, 재위1392~1398)는 우왕(1365~1389, 재위1374~1388)과 창왕(1380~1389, 재위1388~1389)을 시해했다라는 거짓보고를 올린 윤이(?~?)와 이초(?~?)라는 반 이성계파 인물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하는데.. 별 효과가 없어서 조선으로 돌아온다.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 영락제가 고쳤다고 알고 있던 이 부분이 이후 100여년이 지난 1518년(중종13년) 주청사 이계맹이 명나라에 갔다가 조선으로 돌아와서 대명회전 조선국조 주에 그대로 고쳐지지 않았음을 중종에게 보고하는데.. 역시 중종도 개정을 요구하지만 명나라 황제 무종(1491~1521, 재위1505~1521)은 개정에 소극적인 태도로 임한다. 이후로 명종, 선조대에 꽤 적극적으로 개정을 주장하는데 1580년대에 들어 이이(1536~1584)가 강력하게 개정을 주장해서 1581, 1584년두번에 걸쳐 주청사를 보내는데 1584년에 주청사로 보낸 황정욱(1532~1607)이 수정된 대명회전 조선기록 등본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만 1587년에 다시 주청사 유홍(1524~1594)을 보내 대명회전 반사(증명서 격)을 요청하면서 처음엔 거부했다가 칙서와함께 보내지게 되면서 선조가 종묘사직에 고하고, 1589년 윤두수와 동복동생 윤근수(1537~1619)가 대명회전 전체본을 받아옴으로서 선조는 건국 200년만에 조선의 정통성을 바로잡음과 동시에 선조의 입지가 곤고해지는 효과를 본다. 

윤두수는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2등이 되면서 해원군에 봉해진다.

 

임진왜란

종계변무 이후 대사헌과 호조판서를 거치면서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좌의정에 오른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치고올라와 한양근처까지 오면서 선조를 의주까지 피신시킨다. 의주로 피신하기 전 평양에 있을 때 선조가 평양성을 떠나 의주로 피난할 때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을 반대하고 조선의 힘으로 주장하자는 윤두수가 광해군, 김명원, 이원익등과 함께 지키지만 결국 왜군에 의해 패배하고 평양성이 함락당한다. 

  생몰년도 직위
광해군 1575~1641, 재위1608~1623 왕세자
윤두수 1533~1601 좌의
김명원 1534~1602 도원수
이원익 1547~1634 이조판서

선조는 평양성 전투 패전소식을 듣고 명나라에 망명 요청을 하려고 하자 윤두수가 선조에게 급히 달려와 '필부의 행동'이라며 극딜을 넣으며(죽기 각오한듯)망명요청을 철회할 것을 요청한다.  

윤두수는 원균(1540~1597)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유명한데, 1597년 정유재란이 다시 일어나면서 선조가 마침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1545~1598)을 불신하고 있던 터에 윤두수가 이순신을 파직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순신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이후 백의종군 된다. 

이에 후임 삼도수군통제사로 원균을 추천하여 수군을 지휘케끔하지만 원균은 칠천량 해전(1597)에서 대패를 하고 자결하고 다시 이순신이 복직된다. 이후 1598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 1542~1598)이 사망함으로 철군하는 왜군 수만명을 박살내는데 이 해전에서 이순신은 왜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다. 

 

왜란이후

 1598년 말 긴7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1599년 영의정에 이르러 황폐화된 조선을 수습하지만, 양사대간의 탄핵으로 2달만에 영의정에서 물러난다. 이후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하고 해원부원군으로서 정사에 출입하다가 1601년 병으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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