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급 귀족 & 관리/조선

81, 88대 영의정 이산해

Mintaka5 2024. 9. 24.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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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San-hae, 1539~1609

  재임기간 군주
81대 영의정 1590.03 ~ 1592.06 선조23년 ~ 선조25년
88대 영의정 1600.03 ~ 1600.06 선조33년

이산해,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539년 조선 한성부에서 명종대 문신인 아버지 이지번(1508~1575)과 어머니 의령 남씨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조선 중기 문신으로서 여러 직책을 거쳐 정1품 영의정에 오른 동인출신 인물로 정철(1536~1593)처분에 따른 분열로 남인(정철 살리자 온건파)과 북인(정철 처형파)으로 갈릴 때 북인의 영수가 된 인물. 임진왜란(1592~1598)이 터지면서 선조를 피난시키는 등의 일을 담당하지만 왜란전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이 침입하도록 했다는 명목으로 탄핵을 받아 파면된다. 

 

어린시절

목은 이색(1328~1396)의 후손으로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나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면서 이산해의 집안까지 화를 입게 되면서 충청도로 이주하게 된다. 같이 이주해온 작은아버지인 이지함(1517~1578)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글쓰기에 능하고 총명함이 엄청났다고 전해짐. 6살때부터 신동소리를 들으며 자라 14세때 이미 향시에 장원을 해서 대과 응시 자격을 얻기까지 한다. 

숙부는 조카를 가르치다가 조식, 이황에게 보내서 가르침을 받게끔 하고 이미 대과 응시자격을 얻은 시점에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서 수학하고 성균관에 있던 1561년 22세가 되던 해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서 승문원에 채용됨.

 

관직

1561년부터 관직생활 시작이라고 보면됨. 어릴적부터 워낙 글솜씨에 글씨까지 잘 쓴다고 소문이 나 추천을받아 홍문관정자가 됨. 이산해의 인싸력은 명종(1534~1567, 재위1545~1567)의 귀에까지 들어가 경복궁 대액의 글씨를 씀.

  직책 군주
1562 홍문관정자 명종17년
1563 홍문관수찬, 저작 명종18년
1564 사간원정언, 병조좌랑, 홍문관수찬 명종19년
1565 이조좌랑 명종20년
1567 홍문관교리, 이조정랑, 사헌부집의 선조원년
1570 승정원동부승지(정3품 당상관 승진) 선조3년
1571 이조참의 선조4년
1573 대사간 선조6년
1578 홍문관대제학, 도승지 선조11년
1579 사헌부 대사헌 선조12년
1580 병조참판, 형조판서 선조13년
1581 이조판서 선조14년
1583 우찬성 선조16년
1585 좌찬성 선조18년
1589 좌의정 선조22년
1590 영의정 선조23년

 

역린

1591년 정철(1536~1593)과 류성룡(1542~1607)이 세자 책봉을 건의하려 선조를 알현코자 했는데,  영의정 이산해는 병을 핑계로 회의에 나오지 않게되면서, 계속 시간이 끌리다가 정철도 좌의정에서 물러나 영돈녕부사로 사실상 좌천되는등으로 책봉건의안은 공중분해 되어버림. 

1589년부터 일어났던 기축옥사로 서인들이 동인을 아예 씨를 말려버리려고 했던 일로,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동인이 이를 가만두고 볼 수 없었던 것으로, 당시 위관이였던 정철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하다가 마침 정철이 파당을 만들어 사대부들을 모함한 죄로 빡이 친 선조가 정철을 유배보내기에 이른다. 

 이후 서인이 몰락하고 동인이 집권하면서 정철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두고 동인이 정철을 죽여야한다는 강경파 북인과 굳이 죽일 거 있냐라는 온건파 남인으로 나뉘게 되는데 이산해는 강경한 태도를 보여 북인이 되고 영수가 된다.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 발발후 왜군을 피해 선조가 피난을 가야할 상황이 발생하면서 이산해는 호송임무를 맡게되는데, 개성근처까지 도달했을 때 한양이 점령당하면서 선조가 개성에 있을때 국정운영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이산해, 류성룡등이 파직되어졌는데 이산해는 평해(현재 경북 울진)로 유배를 명 받아 3년간 유배생활을 한다.  

유배 3년이 되던 해 1595년에 서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특명을 내려 유배에서 풀려나고 다시 직위에 오르지만 여론을 우려해 여러번 사직상소를 올리지만 선조가 다 무시한다. 

수년간의 전쟁이 지속되다가 1598년 가을경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 1537~1598, 관백재위1585~1592, 태합재위1587~1598)이 사망하면서 왜군이 철군을 하게되면서 왜란이 끝난다(왜군들 철군하기전 노량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한 것은 알죠?). 

 

전란 끝

1598년 12월 긴7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속해있던 북인이 다시 쪼개져 대북파와 소북파로 갈리는데, 이산해는 대북파 영수가 되며 1599년 다시 영의정에 오르게 된다. 

  북인
대북파 소북파
I 이산해(1539~1609) 류영경(1550~1608)
II 이이첨(1560~1623) 박홍구(1552~1624)
III 홍여순(1547~1609) 박승종(1562~1623)
IV 류몽인(1559~1623) 류희분(1564~1623) 

이들은 홍여순의 대사헌 임명문제로 갈등이 생기게 되는데, 임명 후 홍여순을 지지하는 세력인 대북파와 홍여순을 반대하는 세력인 소북파로 분당되게 된다. 더욱 골때리는 건 홍여순을 지지하던 이산해가 홍여순과 트러블이 생겨 저 대북파 안에서도 이산해는 육북, 홍여순은 골북으로 나뉜다. 

 

여기도 퇴직하기 힘드네..

이산해는 여러번 선조에게 사직을 청하지만 선조는 계속 거부하고 파직당해도 다시 복직시키고하는 등 사직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홍여순과의 트러블이 있고도 탄핵건이 있었는데 선조가 이것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면 매우 유능했던 신하임엔 확실하다. 

 

광해군 정식 세자 책봉

1602년 사위인 이덕형(한음, 1561~1613)을 포함한 수백명의 서명을 받아 임진왜란 국난에 앞장섰던 광해군을 정식으로 세자로 책봉시켜달라고 선조에게 건의. 

 

사망

1608년 선조가 승하하면서 원상(국가원로)으로서 정무를 보다가 1609년 고령으로 은퇴해서 그해 여름에 사망. 7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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