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급 귀족 & 관리/조선

20대 영의정 황희

Mintaka5 2024. 9. 19.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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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 Hui, 1363~1452, 영의정재임1431~1449

황희,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363년 고려 개경부 개풍 가조리에서 아버지 황군서(1328~1402)와 어머니 용궁김씨(?~?)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조선 역대 영의정중 가장 긴 재임기간(18년)을 가지고 있는 인물. 사실상 세종(1397~1450, 재위1418~1450)치세 32년중 절반이상을 영의정으로서 세종을 도와 설립된지 50년도안된 조선왕조의 수성기를 잘 넘겨 번영을 이끌게끔 한 장본인.  

 

돈벌러 가야제..

1376년(우왕2년) 13세였던 고려 말기때 음서로 품계가 없는 녹사가 되면서부터 황희의 관직생활 시작이라고 본다. 1376년부터 1449년까지 73년간 관직생활을 할거라곤 생각이나 했을까.. 당시 고려 말 평균수명이 40세가 안되었는데 황희는 89세까지 장수한다.

그리고 1385년 진사시에도 급제해버리는데 이때가 불과 22세였는데, 1389년엔 문과 대과에 급제하면서 비로소 품계(정9품)를 받아 성균관에서 첫 근무를 시작하게 된다.

※황희는 조선이 1392년 개국되면서부터 조선왕조를 반대하여 두문동에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설화등과 섞여버림으로서 팩트라고 쓰기엔애매하니 넘어갈까 한다. 

 

제말이 맞당께요?

성균관을 시작으로해서 춘추관, 사헌부등으로 보직이동도 있었는데, 황희가 워낙 완고하고 아니다싶으면 임금의 말도 반대하고 들고나오니.. 상관들은 골머리가 아플 지경이였는데 이에 황희는 한자리에 가만히 일을 못하고 이리저리 좌천되고 징계를 받고.. 하다못해 부모3년상을 마치지 않고 관직에 복귀한 선공감()의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직첩에 수록하지 않는 일로 태조(이성계, 1335~1408, 재위1392~1398)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된다.

 파직되고 1398년이 되어서야 다시 복직되지만 태조뿐만아니라 2대 정종(1357~1419, 재위1398~1400)의 명령도 거부하는 클라스로 여러번 왕을 분노케 해 파직되었다 복직되었다 반복하게 된다..  

 

이제 보실줄 아는 주군이 나왔네

1400년까지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는 뒤죽박죽 관직생활을 이어오다가 1400년 정종이 아우인 정안대군에게 양위하면서 3대 태종(1367~1422, 재위1400~1418)이 즉위하게 되면서 부터 황희에게도 운이 작용하게 되는데..  태종은즉위원년부터 황희를 여러 부서의 정랑으로 임명하면서부터 이후 관직운이 트여 점점 그 품계가 높아지게 된다. 표로 작성하는게 눈에 잘 들어올 거 같아 다음과 같이 나타내고자 한다. 1400년 이전에 역임했던 관직은 빼고 올리겠다. 

일단, 관직이 많음을 주의할 것 

  직책 비고
1400 정랑(형조, 예조, 이조, 병조)  
1401 도평의사사경력  
1402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  
1404 우사간대부, 좌사간대부  
1405 승정원 지신사(도승지의 전신) 지신사 박석명의 강력한 추천으로 지신사에 오름
1408 판서(형조, 예조, 이조)  
1409 참지의정부사, 형조판서, 대사헌  
1410 지의정부사  
1411 병조판서 명나라 사신으로도 감
1412 이조판서  
1413 예조판서 양녕대군 폐립문제에 반대해 태종에게 노여움을사 좌천  
1415 이조판서, 의정부참찬, 호조판서  
1416 공조판서 양녕대군 폐위를 반대했다가 파직된 후 복직한게 공조판서 
1417 평안도도순문사 겸  평양부사  
1418 한성부판사 국본을 너무 쉽게 바꾼다고 태종에게 직언했다가 짤리고 유배형
1422 의정부 좌참찬  
1423 예조판서, 강원도관찰사 1423년 여름 기근이 도래해 강원도로 파견됨
1424 의정부찬성 겸 대사헌  
1426 이조판서, 우의정 겸 판병조사  
1427 좌의정 겸 판이조사, 평안도 도체찰사  
1431 영의정  

 

누가 나보고 청백리라 한거?

황희를 보통 한치의 뇌물도 허용하지않고 평생 가난하게 자란 청백리의 재상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세종으로부터 수많은 과전을 지급받은것으로도 모자라 1425년 대사헌 재직시 남원부사가 보낸 뇌물을 수수한 것을 순순히 숨기지않고 인정하면서 여론의 질타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던 것.

물론, 넉넉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청빈하게 살았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1428년엔 2차왕자의 난 주동자였던 박포(?~1400)의 아내와 간통한 혐의까지 받는다. 

 

사직... 시켜주세요

1431년부터 황희는 영의정에 오르게 되는데, 이때 황희의 나이가 벌써 68세로 이미 고령이였다. 황희는 영의정 얼마안하다가 아프면 사직하고 고향에가서 쉬어야지 이런생각을 가졌을 것 같다만 18년동안 영의정에 머물줄은 제3자인 본인이봐도 상상하기 매우 힘들 것 같아 보인다. 

세종은 처세술에도 능하고 똑똑했던 황희를 곁에 두면서 정치적으로도 써먹는데, 왕으로서의 고유 권력의 반쪽을 의정부로 옮기게끔 해 상당히 많은 권한을 황희에게 넘겨서 처리하게끔 한 거 같다. 

제도를 정비함에 있어 빈틈이 없었고, 일단은 적이 없었고 청빈한삶을 사는 모습등으로 세종에게 있어서는 결격사유도 없고 턱하면 붕당세력을 만들어(?) 정치적 논쟁을 할 필요도 없었던 황희를(황희는 계파가 없었다. 애초에 세력이 없음.)안정적으로 기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18년간 영의정으로 재임할 수 있었지 않았을 까.. 하는 생각인데 물론 오랜기간동안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시기 질투가 없었진 않았을 것인데, 황희가 사직상소를 내면 세종이 거절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상황을 넘겨나갔을 지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모습들이 재조명되면서 현재 황희와 세종의 관계를 다룬 만화가 나오고 '사직시켜주세요'라는 문구가 드러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드디어 퇴직했다ㅠㅠ

오랜 영의정생활로 이미 80대 후반이 된 황희는 1449년 드디어(?) 세종의 허락을 받아 은퇴하는데 은퇴당시나이가 무려86세에 달했다. 조선 초기 평균수명이 50세가 채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엄청 장수했다고 보여지는데 이는 현재로서도 고령에 속하는 연령이니 말다함.. 

그렇게 1449년 고향으로 돌아가 쉬다가 1452년 89세로 사망. 

1455년 남원부원군에 추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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