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yu Seong-ryong, 1542~1607, 영의정재임1592, 1593~1598
출생
1542년 조선 경상도 의성현(현 경북 의성군)에서 아버지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1515~1573)과 어머니 안동 김씨사이에서 태어남. 위로는 형 류운룡(1539~1601)이 있다.
배경
임진왜란이라는 전시상황에서의 영의정으로서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를 보필하고 전쟁을 수행하면서 국난을 극복하게끔 한 장본인이다. 여러 평가가 나뉘지만 전란의 위기의 조선을 구했다는 평가가 후에 이루어졌다.
역시 천재는 때깔부터 다르네..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뛰어난 머리로 이황에게도 높이 평가받으면서 학문을 익히다가 1564년 생원,진사(소과)가 되어 1565년 성균관에 들어가서 1566년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게 되어 관직을 하사받아 승문원에 들어가게 된다. 이미 궁으로 들어오기 전에 스승인 이황(1502~1569)과도 심도깊은 학문교류로 스승제자관계를 초월했는데 1569년 서장관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오게 되는데 명나라내에서도 지식인들이 류성룡의 학문적 깊이와 인품에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
붕당
I. 사림의 분열
류성룡이 관직에 있을 시기엔 마침 정치적으로 분열이 일어났는데, 1565년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1501~1565)가 승하하면서 덩달아 남동생이자 소윤의 영수인 윤원형(1509~1565)이 탄핵되어 추방당하고 사사되면서 사실상 멸족직전까지 갔던 사림이 정계로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쪼개지게 되는데, 그 발단은 원래 조선의 인사권은 이조에서 관할하고 있었는데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는 별도의 인사가 운영되고있었는데, 삼사는 관료의 감찰이라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기관이여서 이조판서가 이곳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에, 별도로 삼사관리 임명권을 이조전랑이라는 직책에 부여하게 되는데, 이조전랑은 품계와 상관없이 독립적인 임명권을 가졌기에 누구도 관여할 수 없었기에 그 권한이 막강한 요직이였다.
그런데 마침 이 이조전랑 직책을 두고 김효원(1542~1590)과 심의겸(1535~1587)간에 갈등이 일어나는데, 이미 이조전랑을 지낸 김효원이 1575년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1545~1594)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면서 반대하는데 그 명분은 외척이라는 것.. 이게 뭐냐면 심의겸의 누나인 인순왕후 심씨(1532~1575)가 명종의 왕비로서였기 때문이였고, 이미 1565년 사망한 외척 정치의 끝판대장 윤원형의전횡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기때문에 심의겸이 외척으로서 전횡을 일삼는다는 논리가 통했던 것이였다..
그렇게 해서 같은 사림내에서 동인과 서인으로 따로 분리가 되어버린다. 김효원은 궁 동쪽에 살았대서 동인, 심의겸은 궁 서쪽에 살았대서 서인으로 분류된다.
다음 표는 김효원 지지, 심의겸 지지세력의 간단한 명단이다.
동인 | 서인 | |
I | 김효원(1542~1590) | 심의겸(1535~1587) |
II | 김우옹(1540~1603) | 이이(1536~1584) |
III | 이산해(1539~1609) | 성혼(1535~1598) |
IV | 류성룡(1543~1620) | 윤두수(1533~1601) |
V | 허엽(1517~1580) | 정철(1536~1593) |
류성룡 역시 이때 동인으로서 붕당에 참여하게 된다.
II. 기축옥사
1589년 동인인 정여립(1546~1589)이 반역을 꾸미고있다는 고변으로부터 시작되는 사건이 터지는데, 정여립에게 체포영장이 떨어진 도중에 자결함으로서 반역이 기정사실로 굳어지면서 선조는 관련자에 대한 수사를 시작하면서 위관(사건조사 재판관)을 동인인 정언신(1527~1591)으로 세우는데, 정언신이 정여립의 9촌이라는 점에서 반대의사가 나오면서 서인인 정철(1536~1593)으로 교체된다.
그러나 서인계열 인사들은 이때 1584년 이이가 사망하면서 동인들에게 뺏긴 정권을 장악하기위해 동인들을 숙청하기위해 사건을 확대시키고 만다. 3년간 1천여명이 넘는 동인이 숙청(사형, 사사, 유배등)되면서 위관이였던 정철이 지나치게 가혹한 옥사를벌인 것 아니냐는 비난도 받는다. 실제로 여론이 의식이 되었는지 1590년 위관이 류성룡으로 바뀌게 된다.
또 갈라지나?
1590년 우의정일때 기축옥사 위관이였던 정철이 탄핵을 받아 처벌될 위기에 놓이게 되면서 동인 내에서도 의견이 갈리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당시 영의정이였던 이산해(1539~1609)는 기축옥사때 당한거 복수를, 류성룡은 죽이지 않게끔 선처를 선조에게 호소했다. 이렇게 이산해를 중심으로한 강경파(정철 죽이자)와 온건파(정철 살리자)로 갈라져 동인내에서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게 된다. 강경파는 북인, 온건파는 남인.
임진왜란
1591년 왜에서 통신사 파견을 조선에 요구하게 되면서 조선 조정내 여론이 복잡해졌는데, 일단은 정찰을 먼저 하자는 의견으로 합의가 봐져서 통신사 정사 황윤길(서인, 1536~?)과 부사 김성일(동인, 1538~1593)을 통신사로서 파견하는데, 이들은 왜국을 1년간(1591. 02~1592.02) 보고온뒤 보고할 때 황윤길은 필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 대비를 해야한다고 하고 김성일은 그럴 염려가 없다고하는데, 류성룡은 같은 동인인 김성일의 말을 들어줌으로서 전쟁대비는 쏙 사라지고 마는데..
통신사가 복귀한지 2달만인 1592년 4월 왜군이 대병력으로 부산포에 침입하게 되면서 난리가 난다. 류성룡은 과거에 방비를 하지 않게 한 책임론이 나오게 되면서 야인신세가 되어버리는데., 파죽지세로 치고 올라오는 왜군을 피해 선조역시 북쪽으로 몽진을하게 된다. 몽진은 당시 영의정 이산해가 맡게되는데, 선조 일행이 의주(현 평북 신의주)에 당도했을 때 몽진에 대한 책임으로 영의정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류성룡이 영의정이자 도체찰사가 되면서 전쟁을 수행하게 되는 최전선에 위치하게 된다.
1594년 훈련도감을 설치해 신분 고하 가릴 것 없이, 천민또한 전공을 세우면 면천을 시켜주는 한편, 명나라 장수 낙상지(?~?)를 교관으로 하여금 검술, 포술등을 가르치게끔 해서 상비군을 양성케 해 왜군으로부터의 전쟁수행 병력을 늘리고자 했다.
치열한 시기의 영의정
1593년부터1598년까지 5년간의 영의정 역임은 류성룡에게 있어서도 잊지못할 시간들이였을 것이다. 명나라와의 관계 조율, 전쟁 수행, 심지어는 1597년 자신이 추천한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이 역모죄로 끌려와 국문을 받는데 여기에, 2가지 내용이 존재하는데 류성룡 본인이 집필한 징비록과 선조실록의 내용이 다르다.
징비록 | 선조실록 | |
내용 | 이순신을 천거한 사람이 본인이므로, 나와 사이가 좋지 못한 사람들이 공격했다. | 류성룡 본인이 이순신을 천거했던 것은, "사람을 잘못 보았기 때문" |
이원익(1547~1634)과 정탁(1526~1605)이 이순신의 참형을 면하게 상소를 올려 백의종군 조치가 취해진 것. 두 서적의 내용이 다르고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아 일단 본인의 생각은 접는 게 나을 듯 하다.
야인으로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 명나라 경략(위기상황시 비상관직, 비변사 도제조와 비) 정응태가 조선과 왜가 힘을 합쳐 명을 치러 온다고 명 조정에 무고한 사건으로 인해 조선에서도 이를 해명하기위해 영상이였던 류성룡이 가야한다는 여론이 커지면서 갔다오라고 부탁하는 과정에서 류성룡이 노모가 있다는 이유로 사양하게 되는데, 북인이 이를 빌미로 류성룡을 탄핵해버림으로서 영의정에서 삭탈관직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사실상 1600년대 들어오면서 부터는 고향집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징비록을 저술하는데 시간을 보낸다.
이후 1607년 65세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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