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ongjo, 1694~1776, 재위1724~1776
출생
1694년 조선 한성부 창덕궁 보경당(숙빈 최씨 거처)에서 아버지 숙종(1661~1720, 재위1674~1720)과 어머니 숙빈 최씨(1670~1718)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남. 위로는 태어나자마자 죽은 형 영수(1693)가 있다.
배경
1699년 연잉군에 봉해지고 1704년 훗날 정성왕후가 되는 참봉 서종제(1656~1719)의 딸 달성군부인 서씨(1693~1757)와 혼인하게 된다. 이복형 세자 윤(20대 경종, 1688~1724, 1720~1724)의 생모 희빈 장씨가 1701년 무고의 옥으로 사사되면서 이 사건을 주도한 노론의 눈치를 보느라 세자시절을 불안하게 유지하다가 세자의 거치문제를 두고 숙종과 이이명의 정유독대(1717)로 노론과 심지어 세자를 지지하던 소론의 비난을 사게된다. 1720년들어 연잉군은 노론세력, 세자는 소론세력이 서로 팽팽하게 대립하는 상황이였다.
세제 책봉
1720년 숙종이 승하하고 세자 윤이 경종으로 즉위하고 노론은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한다. 그러나 노론4대신이(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한술 더 떠서 세제의 대리청정을 건의하게 되면서 논란이 발생하게 되는데, 경종은 별다른 의심없이 대리청정을 승인한다.
신임옥사
그러나 소론쪽에서 노론을 몰아내는 아이디어를 짜다가 지관 목호룡(1684~1724)이 경종에게 역적이 있다고 고변하게되면서 상황이 급작스럽게 흘러가게 된다. 목호룡이 지목한 인물들 수십명이 체포되게 되는데 역모로 몰려 대부분이 처형당하게 된다. 위에 언급한 노론4대신역시 이때 처형당하게 된다.
노론 4대신 | 생몰년도 | 최종직위 |
김창집 | 1648~1722 | 영의정 |
이이명 | 1658~1722 | 영의정 |
조태채 | 1660~1722 | 우의정 |
이건명 | 1663~1722 | 좌의정 |
연잉군의 든든한 지지세력이였던 이들이 모두 처형되게 되면서 연잉군은 지지세력을 잃고, 목호룡과 더불어 신임옥사를 주도한 소론 김일경(1662~1724)의 음모로 위협을 받기까지 한다.
그러나 경종은 몸이 점점더 좋지 않게 되며, 왕비였던 선의왕후 어씨(1705~1730)가 비밀리에 다른 종친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후사를 잇게하려고 시도한다. 그래도 경종이 연잉군을 비호하면서 왕세제 직위는 유지하게 된다.
위 표의 노론 4대신들은 1725년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한지 1년되는 해에 전원 신원된다(을사처분).
경종 승하
1724년 경종이 갑자기 앓아누으면서 승하해버린다. 문제는 연잉군이 경종 승하전에 게장, 전, 꿀, 감, 인삼차를 든 일이 있어서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고 초반에 경종을 독살한 거 아니냐는 설이 유포된다. 이후 영조를 계속해서 건드는 일이 되어버린다.
재위
경종승하후 1724년 즉위하자마자 신임옥사를 주동했던 김일경(1662~1724)과 목호룡(1684~1724)을 처형하는 것으로 첫 정무를 보게 된다. 물론 자기의 지지기반 노론을 등용해 노론정권이 만들어지지만 너무 또 독주하면 권력이 치우칠까봐 소론도 어느정도 중용하는 권력의 균형을 맞추게 된다.
정미환국
영조때도 환국은 이어진다.. 1727년 정미년에 일어난 환국이래서 정미환국이다.
영조는 즉위하기전 신임옥사로 소론전체에 대한 노론의 강경대응 여론이 득실했지만 영조는 김일경, 목호룡을 처형하는 선에서 마무리 짓는데 위와 같이 어느정도 소론을 중용하며 권력의 균형을 맞추던 영조가 노론 강경파가 소론을 전부 역적으로 몰아 처형하자는 주장을 묵살하다 묵살하다 결국 폭발해 1727년 노론 강경파를 정미환국으로 추방시키고 딱 반반 등용하면서 탕평정책을 기본으로 삼아 안정시키게 된다.
이인좌의난
1727년 소론출신 이인좌(1695~1728)가 경종의 승하로 기반이 사라진것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이인좌의난(1727)이다. 김일경, 목호룡이 1724년에 처형당하면서 나머지 소론은 불만을 품고 기회를 엿보다가 노론일부가 실각되는 정미환국이후 밀풍군 이탄(소현세자후손, 1698~1729)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고향 청주를 점령한 이인좌가 한양으로 북상하게 되면서 도원수 오명항(1673~1728)의 토벌군과 맡붙으나 무참히 깨지며 협상까지 시도하지만 대세가 완전히 기울어 대열이 완전히 무너지게 되면서 이인좌도 도주하나 체포되어 처형된다.
반란 핵심인물 | 비고 | 이인좌의난 이후 | |
I | 이인좌, 1695~1728 | 세종대왕 4남 임영대군 9대손 | 도원수 오명항에의해 체포후 처형 |
II | 정희량, ?~1728 | 참봉 정중원의 아들 | 영남지역 담당. 이인좌세력이 와해되고 난 이후에도 저항하다가 도원수 오명항에 패배후 박필건에게 체포되어 참수 |
III | 박필현, 1680~1728 | 의금부도사, 탄핵당한후 태인현감 | 호남지역 담당이였으나 전라감사 정사효에 의해 반란 계획이 부하들에게 발각되어 실패후 참수 |
이 난이 진압되면서 위의표는 난의 3인방모두 처형되고, 밀풍군 이탄도 이듬해 1729년 사사되면서 완전히 마무리된다.
계몽군주
I. 민심이 안정되야 나라도 안정된다
아버지 숙종때부터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여 영조대에와서 그 기반을 토대로 계몽적인 정책들이 많이 나오게되면서 한국사 교과서에도 많은 내용이 나오게 된다..
백성들의 인권을 생각한 영조가 신문고제도를 부활시켜 억울한 일을 당한 자들을 최대한 돕고자 하였고, 형벌 개정, 금주령 실시등으로 안정을 꾀했고, 백성들이 굶지않도록 식량을 구제하고, 세금을 줄이는 균역법 (1750)을 실시하면서 신분고하에 따라 차등 부담하게 하였다.
II. 학문
영조는 학문을 좋아했고 스스로 서적도 집필하면서 서적을 간행, 반포하면서 민중들 모두가 읽을 수 있게끔 하였는데, 학자들도 많이 등용하고 실학파를 지원하면서 문화, 예술을 포함한 많은 분야에 걸쳐 부흥기를 이룩하게끔 한다.
발간년도 | 편저 | 내용 | |
숙묘보감 | 1729 | 영조, 윤순 | 역사서 |
퇴도언행록 | 1732 | 이수연 | 퇴계 이황의 학문세계를 기록한 서적 |
어제여사서 | 1737 | 영조, 이덕수 | 사회, 교육, 전통교육등을 다룬 서적 |
소학훈의 | 1754 | 영조 | 소학 해설서 |
속오례의 | 1754 | 영조 | 성종때 편찬된 '국조오례의'를 보완한 의례집(왕실 예법) |
속대전 | 1746 | 서종옥, 김약로, 이종성, 이일제, 김상성, 구택규 | 조선후기의 법전 |
무원록 | 1747 | 구택규, 구윤명 | 백성을 다스릴때 법을 선용하라는 취지로 만든 관리들의 필독서, 수사방법론 |
속병장도설 | 1749 | 조관빈, 박문수 | [병장도설]체제를 본떠 무예법을 재정리한 군서/병서 |
누주통의 | 1753 | 안국빈 | 천문서 |
해동악장 | 1765 | 홍계희 | 가곡집 |
여지도서 | 1757~1765 | 8년간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았음 | 읍,면,리별로 가호수, 인구수를 상세히 기재된 서적 |
동국문헌비고 | 1770 | 홍봉한 | 조선의 문물제도 전반을 기록한 백과사전 |
사도세자
영조의 아픈손가락 사도세자(추존왕 장조, 1735~1762)가 여기서 나온다. 1750년 사도세자의 세자빈인 혜경궁 홍씨(추존 헌경왕후 홍씨, 1735~1816)이 손자 이정(1750~1752)를 출산하게되면서 영조가 매우 기뻐했지만 갑작스럽게 1752년 병으로 사망. 그리고 그해 1752년 22대 정조가되는 이산(1752~1800, 재위1776~1800)이 태어나게 되는데 갑자기 영조가 병석에 눕게되면서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게끔 한다.
그러나 노론과 소론 모두의 이야기를 듣고 결정하는 사도세자에게 불만이있던 노론은 자기들 뜻데로 행해주지 않은것에 노론은 영조에게 직접가서 사도세자의 잘못된 정치관을 고해버리고.. 영조는 세자를 꾸짖지만.. 사도세자는 정신질환등을 앓고있던 시점이였고, 궁녀, 유아 살해등 궁내부 사람들을 이유없이 죽이거나 칼로 협박, 정순왕후(1745~1805)와도 갈등을 일으키며 궁이 점점 시끌시끌해진다.
뒤주
사도세자의 의문적 행위들이 계속 지속되다가 1762년 나경언(형조판서 윤급의 종)의 사도세자의 비행내용을 담은 10조목 을 고변함으로서 영조는 화가 끝까지 치밀어오르는데, 사도세자는 억울함을 느끼고 나경언과 3자대질을 요구하지만 영조는 듣지않고, 계속해서 세자의 비행문제가 보고되면서 영조가 결국 사도세자에게 칼을주며 자결을 요구하지만 사도세자가 거부하면서, 우리가 잘 알고있는 스토리인 뒤주에 가두어버린다.
사도세자는 8일동안 갇혀 굶어죽어버린다 이 사건이 1762년 임오년에 벌어진 임오화변이다. 원래는 장헌세자였는데 임오화변으로 목숨을 잃은 세자를 영조가 세자자리를 회복시키면서 사도세자라는 시호를 내리게되면서 우리에게까지 알려진다.
말년
영조가 나이가 들어 사도세자의 아들인 이산(정조, 1752~1800, 재위1776~1800)을 왕세손으로 삼아 이미 죽은 아들 효장세자(1719~1728)의 양자로 입적시킨다. 1770년 이후 80세에 가까웠던 영조는 세손 이산에게 양위를 하려했으나 대신들의 극렬한 반대로 1774년 영조가 80세가 되었던 해에 대리청정을 명하게 된다.
이후 1776년 82세를 일기로 승하한다. 재위기간은 52년으로 조선역대임금중 가장 길다.
묘호는 영종이였으나 26대 고종(1852~1919, 재위1863~1907)때 영조로 격상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