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군주(한국어, 프랑스어)/조선의 군주

16대 인조

Mintaka5 2024. 8. 20.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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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jo de Joseon, 1595~1649, 재위1623~1649

 

 

출생

1595년 조선 황해도 해주 정원군 사저(임진왜란4년, 왜란이후 피난길에 황해도에 왕족들이 머무름)에서 아버지 정원군(추존왕 원종, 1580~1620)과 어머니 구씨 부인(추존 인헌왕후, 1578~1626)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남. 본명은 이종. 봉호는 능양군으로서 아래 동생으로는 능원군(1598~1656), 능창군(1599~1615)등이 있다.

 

배경

한국사에 단골로 등장하는 군주이다.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군주로서는 최고의 치욕을 겪은 군주로 역사에 남아있다. 아버지 정원군은 조선 14대 왕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와 인빈 김씨의5남으로 그의 형제(동복, 이복)는 다음과 같다.

  군호, 이름 생몰년도 생모(모두 빈 : 내명부 정1품) 기타
1 임해군 이진 1572~1609 공빈 김씨(1553~1577) 광해군 즉위2년(1609) 사사
2 광해군 이혼 1575~1641 조선 15대 국왕
3 의안군 이성 1577~1588 인빈 김씨(1555~1613)  
4 신성군 이후 1578~1592 임진왜란1년(1592)때 병사
5 정원군 이부 1580~1620 16대 인조의 아버지, 추존왕 원종
6 순화군 이보 1580~1607 순빈 김씨(?~1647)  
7 인성군 이공 1588~1628 정빈 민씨(1567~1626) 역모로 1628년(인조6년) 사사
8 의창군 이광 1589~1645 인빈 김씨(1555~1613)  
9 경창군 이주  1596~1644 정빈 홍씨(1563~1638)  
10 흥안군 이제 1598~1624 온빈 한씨(1581~1664) 이괄의난(1624)에 연루되어 처형
11 경평군 이륵 1600~1673  
12 태어나자마자 죽은 군(1603)
13 인흥군 이영 1604~1651 정빈 민씨(1567~1626)  
14 영창대군 이의(적장자) 1606~1614 인목왕후 김씨(1584~1632) 계축옥사(1608)에 연루되어 1614년 유배지에서 사망
15 영성군 이계 1606~1649 온빈 한씨(1581~1664)  

인조또한 방계출신에 서자이고 할아버지 선조역시 방계출신에 서자였던 탓에 인조 이종(능양군)은 선조가 처음 본 손주로서 특별히 총애했다고 한다. 

 

왕이될 상인가?

태어나면서 범상치 않은 인상을 가졌다고 한다. 선조가 이를 기이하게 여겨 한 고조(유방, 기원전256~기원전195, 재위:기원전202~기원전195)와 같은 상(넓적다리에 사마귀가 무수했다고함)이니 누설하지 말라고 했으나, 누설되고 백성들사이에서 정원군의 사가에 왕기가 흐른다등의 소문이 퍼지면서 이종(능양군)의 동생 능창군이 사망하게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어버린다. 

이는 1615년(광해군7년) 능창군 추대사건(신경희의 옥사)이 발생하게 되면서 능창군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광해군은 능창군이 왕위에 뜻이 있는걸로 해석했음)역모죄로 뜬금없이 붙잡히게 되고, 강화도로 귀양을 가게되고, 비참하게 살다가 유배지에서 자살하게 된다.

이종은 선조가 살아있을 적(1607)에 능양군에 봉해진다. 

 

 

인조반정의 불씨

숙부였던 광해군(1575~1641, 재위1608~1623)에 의해 동생 능창군이 유배지에서 자살하고 아버지 정원군이 아들의 억울한 죽음으로 몸져눕게되며 5년뒤 1620년 서거한다. 이때 집안을 풍비박산낸 숙부 광해군에게 복수를 다짐했다고 전해진다. 

광해군의 폐륜(형제 임해군,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킴),폭정이 절정에 다다른 1620년대에 들어서 반정모의가 나오게 된다. 이때 서인, 남인의 주축이 능양군을 비밀리에 만나 모의를 한다. 아래 표는 반정모의의 주도대신.

  본관 구분 생몰년도 최종 직책, 작위 기타
이서 전주 무신 1580~1637 병조판서, 완풍부원군 성혼의 제자
이귀 연안 문신 1557~1633 이조판서 이이, 성혼의 제자
이괄 고성 무신 1587~1624 평안도 부원수 인조반정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어 이괄의난 주동으로 처형
신경진 평산 무신 1575~1643 영의정 무장 신립(1546~1592)의 아들
최명길 전주 문신 1586~1647 어영청 도제조, 완성부원군 병자호란이후 나라를 팔아먹은 인물로 백성들에게 질타받다 병사
김자점 안동 문신, 무신 1588~1651 영의정 역모혐의로 거열형에 당함
김류 순천 문신 1571~1648 영의정, 승평부원군 강빈사사에 반대하다 인조의 노여움을 사 영의정에서 물러남
구굉 능성 무신 1577~1642 판의금부사, 총융사 인조의 외삼촌[인헌왕후(정원대원군의 부인)의 친정오빠]
구인후 능성 무신 1578~1658 좌의정 1653년 우의정으로서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소현세자빈 강씨의 신원을 요구하다 효종의 노여움을 사지만 다시 우의정으로 복관, 이후 좌의정이 됨

모두가 1620년에 들어서 모의를 한건 아니지만 이 표는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날때 참여한 공신들의 목록이기도 하다. 

 

즉위

1620년부터 모의한 거사가 1623년 4월 12일 새벽 능양군은 인목왕후 폐위, 후금과 우호적관계, 영창대군과 임해군 사사라는 명분을 내세워 2천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궁을 장악하고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16대 인조로서 즉위하게 된다. 즉위하자마자 아버지 정원군을 정원대원군으로 추증하고 1632년(인조9년)에 추존왕 원종으로 추존시킨다(쉬운일은 아니였음).

물론 광해군때 정계의 핵심인물들의 숙청또한 바로 시행하게 된다. 아래는 광해군때 핵심 인물로 인조반정때 처형되는 대신들 목록(다는 아님).

  생몰년도 최종직책, 작위 비고
이이첨 1560~1623 예조판서, 광창부원군 대북파 수장
정인홍 1536~1623 영의정 남명학파 수장
유희분 1564~1623 좌찬성, 문창부원군 광해군의 매제

이 3인방은 모두 대북파로서 인조반정때 대부분 숙청당하면서 서인, 남인들을 등용하게 된다. 

 

이괄의 난

1624년 반정공신 이괄(1587~1624)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면서 선조의 10남 흥안군(이제, 1598~1624)를 추대하여 인조가 피란길에 오르기까지 할 정도로 그 세가 막강했다. 그러나 안령(현 경기도 안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이괄이 밀리기 시작하면서 반란군이 흩어지고 이괄은 도망치게 되는데 경기도 이천일대에서 이괄과 함께 했던 반란군 이수백(?~1634)에게 한명련(?~1624)과 함께 암살당하고 수급을 전달해 본인은 살아남게되어 귀양을 가게된다.

 

정묘호란

중립외교를 펼치던 광해군과는 다르게 망해가던 명나라편을 드는 친명정책을 펼치게 되면서 후금의 반발을 사게되는데, 안그래도 이괄의난때 이수백에게 암살당한 한명련의 아들인 한윤(1597~1650?)과 사촌인 한택(?~?)이 후금에 투항하게되면서 당시 후금의 통치자였던 홍타이지(청 태종, 1592~1643, 후금재위1626~1636, 청나라재위1636~1643)에 중용되게 되면서 정묘호란의 불씨가 커지게 된다.

1627년 홍타이지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게되면서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게 되면서 수도가 옮겨지게 되고 왕족모두 뿔뿔히 흩어지지만 최명길(1586~1647)의 강화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조선-후금간 정묘화약이 맺어지면서 형제의 의로서 약속을 맺으며 후금군은 물러간다.

 

병자호란

정묘호란때 침략했던 후금의 수장 홍타이지가 1636년 후금을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청 태종)로 즉위하게 되는데, 사사건건 명나라뒤에서 불편하게 하던 조선을 그냥 두어선 안되겠다 판단하여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재침략하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청나라 군대가 국경쪽부터 성을 지나쳐오면서 그냥 무시하고 오는바람에 청군이 황해도에 도달할때쯤 조정에서도 이사실을 알게되면서 부랴부랴 아들 봉림대군(17대 효종, 1619~1659)과 인평대군(1623~1658)을 강화도로 먼저보내고 인조도 강화도로 대피하려했으나 남한산성에 고립되어버린다.

이에 인조는 군대를 모으기위해 각 도에 서신을 보내지만 오지않고, 그나마 왔던 경기도쪽 원병은 청군에 의해 모두 전멸되어버리고, 충청도 원병, 강원도 원병, 경상도 원병모두 청군의 군대에 의해 모두 전멸되어버린다.

남한산성에서 인조는 죽으로 연명하고 겨울의 혹독한 엄동설한에 모두 지쳤는데 그와중에 강화도가 함락되어버리고 더욱이 청군의 홍이포가 남한산성의 성벽을 부수면서 당황한 인조와 더불어 친청파(김상헌, 1570~1652)와 반청파(최명길, 1586~1647)이 허구한날 논쟁을 벌이지만 수확은 없었다.

결국 인조는 왕자를 청에 인질로 보내고자 능봉군을 세자로 속여 청나라에 보내게되지만 어떤 조선인이 밀고하는바람에 퇴각을 중단하고 다시 와서 남한산성을 다시 압박하기에 이른다.

 

삼전도의 굴욕

남한산성에서 59일간을 버티던 인조는 결국 항복하게 되는데, 항복이라는 표현을 쓰고싶지 않았던 인조가 하성이라 쓰도록 명하면서 이때 공식적으로 정축하성(정축년 1637년 음력 1월 30일, 삼전도의 굴욕)으로 쓰인다.  인조는 청 태종 숭덕제(홍타이지)앞에 무릎을 꿇고 삼배구고두례(세 번 절할때마다 세 번씩 이마를 땅에 찧는)를 행하게 된다. 역사속에 인조의 굴욕으로 표현되어있는 삼전도의 굴욕의 순간이다. 이때 조선과 청나라는 군신의 예를 맺게 되면서 인조는 숭덕제의 신하가 된다. 이때 아들 소현세자(1612~1645)와 봉림대군(17대 효종, 1619~1659, 재위1649~1659)이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지게 된다.

 

말년과 소현세자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두 아들중 소현세자는 쾰른(신성로마제국)출신 청나라 선교사 아담 샬 폰 벨(Adam Schall von Bell, 1591~1666)을 통해 서구 문물을 접하게 되며 1645년 초 조선으로 돌아오게되면서 백성의 민심을 얻은 아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김자점 일파가 소현세자를 공격해 독살케끔 해버린다.

이후 강빈의 옥사 봉림대군 세자책봉까지 인조 승하 5년전은 말그대로 혼란의 연속이 된다. 두차례의 호란으로 인해 임진왜란이후 회복되던 국력이 다시 꺾이게 되고, 붕당정치는 계속 대립을 이어가고 김자점이 외척세력으로서 정권을 장악해버리면서(1646) 왕권이 더욱 흔들리게 된다.

1649년 5월 창덕궁에서 54세로 승하하게 된다. 묘호는 처음에 열조로 받았지만 그다음주 인조로 개정[열조묘호는 남당 열조 서지고(889~943, 재위937~943)의 묘호라 해서 바꿔야한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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