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ongjo de Joseon, 1752~1800, 재위1776~1800
출생
1752년 조선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에서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 추존왕 장조, 1735~1762)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추존 헌경왕후 홍씨, 1735~1816)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남. 본명은 이산.
배경
할아버지 영조(1694~1776, 재위1724~1776)의 치세를 이어 조선의 르네상스형 군주라는 평을 듣는 22대 정조이다.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영조승하 2년전부터 대리청정을 하고 즉위. 노론 벽파세력과 평생동안 갈등하고 특히 노론 벽파의 후원자인 왕대비 김씨(정순왕후, 1745~1805)와도 끝까지 갈등을 빚는다. 홍국영(1748~1781)을 통한 세도정치의 첫 시작, 장용영 창설, 수원화성 축성, 유학경전 통달로 경연장에서 신하들에게 유학을 가르치는 '문'과 무예까지 깊게 연마하여 '무'까지 문무를 통합한 군주로서 조선 후기 중흥기를 이끈 군주로 평가된다.
아버지 사도세자
영조편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사도세자가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게되는데, 영조에게 혼도나고, 정신질환이 있던 시점에 사건들을 터뜨리면서(궁녀, 유아살해, 정순왕후와도 갈등)1762년에 이르러 10조목 고변으로 영조가 칼을 주며 자진을 명하지만, 거부하면서 뒤주에 가둬서 8일만에 굶어죽게된다. 사후 영조가 사도세자로 신원한다.
이산은 1761년 할아버지 영조로부터 왕세손으로 책봉되기에 이른다.
스승 김종수
세자로 책봉되고나서 영조는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기위해 1766년 과거에 합격한 김종수(1728~1799)를 세손궁에 보직시켜 세손을 보필게끔 하는데 이후 1768년 식년문과(과거)에 급제하여 이때부터 세손 이산의 사부가 되어 가르치게 된다.
I. 통합형 인재가 되어야합니다 저하
김종수는 세손에게 주자성리학의 본질을 가르치면서, 군주가 학문을 이끌어 이상을 실현시키려면 실력을 닦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학문과 군사 모두 뛰어나야함을 역설한다. 그리고 군주는 군주는 스승이면서 동시에 아버지가 되어야한다고 입버릇처럼 아주 많이 강조했다고 한다.
그리고 더욱이 성리학만이 진리라는 견해는 잘못된 견해이니, 절대적 가치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가르침을 전달한다.
II. 의리론
김종수의 보직이 계속 바뀜에도 시간이 지나서 다시 세손을 보좌하는 보직으로 왔을때 또 가르친다. 세손에게 외척의 정치관여를 배제해야한다라는 주자학의 의리론이 세손에게 깊은 감명을 주게되면서 훗날 정조로 즉위하게 되었을 때 기본적 근본가치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니들 잘해라이 내 손편지받고싶나?
정조는 대신들에게 개인적인 편지를 보내서 막후에서 정치를 조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편지를 어찰첩이라 하는데, 편지의 주된 내용은 인사문제, 상소로 제기된 민원, 정조 자신의 건강상태, 신하의 대소사(집안행사)등. 직접 편지를 써서 비밀리에 보내졌다고 한다. 왕의 편지를 받으면 사실 반은 명령서와 같은 내용도 많아 혹여나 맘에 들지 않은 내용이더라도 감히 여론을 형성해 반박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관리를 거쳐서 단계단계 올라오는 상소보다 훨씬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군주가 편지를 써서 신하들에게 직접 보내는 경우는 수십년전 청나라 황제 옹정제(1678~1735, 재위1722~1735)역시 행하였는데 '주접'이라는 연락 수단을 통해 신하들을 조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똑같은 패턴. 옹정제역시 관리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정조가 표현한 것처럼 다양한 내용을 보냈지만, 정조는 양반이였다.
옹정제는 '주비 유지'라고 당시 황제만이 붉은 먹을 쓸 수 있었는데 주비유지는 지적사항이나 지시사항을 써서 보내는 것이였다. 붉은 먹의 뜻은 일단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악플이다. 붉은먹의 주접을 받은 관리들은 벌벌떨 수 밖에 없었다. 선플은 검은 먹..
왕의 편지를 받은 주된 피해자(?)는 다음과 같다
생몰년도 | 최종 직위 | 편지형태 | 기타 | |
채제공 | 1720~1799 | 영의정 | 선플, 악플 | 사도세자의 스승, 업적도많고 탈도 많음 |
조심태 | 1740~1799 | 형조판서/장용영대장 | 악플 | 훈련도감의 야근상태가 극히 해이하다..유배 |
홍낙임 | 1741~1801 | 승지 | 선플 | 천주교 신자로 1801년 신유박해때 사사 |
심환지 | 1730~1802 | 영의정 | 악플스러운? | 어찰집의 주인공, 정조의 순화된 쌍욕을 그대로 받아침 |
박지원* | 1737~1805 | 양양부사 | 악플 끝판 | 정조는 박지원의 문체가 맘에안들어 연암체라 지목해 문체반정하지만 정작 자신은 쌍욕, 속담을 과감하게 사용 |
*열하일기(1780)의 작가. 청 고종 건륭제(1711~1799, 재위1735~1796)가 열하로 휴가를 갔을 때 박지원이 그곳까지 따라가 여행하며 감상을 적은 기행문.
수원화성
정조는 1787년부터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1789년 화성에 일단 아버지의 묘를 옮기고, 채제공을 공사책임자로 임명하고 성을 축조하라고 지시하게 된다(1792년 공사시작). 공사시작과 함께 최측근이자 부르면 바로 와야했던(?) 정약용(1762~1836)에게 성을 빠르게 축조하기위한 도구를 개발하라고 지시하는데 이것이 거중기이다. 정약용은 거중기를 개발할때 참고했던 뉴턴 고전역학에도 나오는 물리학의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서적이 청나라 강희제(1654~1722, 재위1661~1722)의 치세때 독일 출신 선교사 요하네스 테렌츠(Johannes Terrenz, 1576~1630)가 지은 [기기도설, 1627]이다.
정조는 계몽군주답게 강제 부역으로 공사를 진행하지 않고, 현재의 건설역군(3D직종)과 같이 부역의 형태로 징발해 급여를 지급하고 공사에 들어간 자재, 인건비등을 모두 기록해 남겼다고 한다. 이는 (화성성역의궤, 1801)로서 현재까지 남게된다.
수원화성 완공 후 정조는 장용영을 주둔시켜 직접 군을 움직일 수 있게끔 한다. 아버지의 무덤을 옮겨 모시는 정도에서 국한되는 사업이 아니라 속으로는 왕권강화를 하기위한 생각까지 겸비되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천주교
1582년(만력10년)에 마테오리치(1552~1610)가 예수회 선교사들을 데리고 명나라에 들어와 베이징에 천주교회를 세우고, 천주교를 전파하면서 명나라의 종교, 문화등을 보며 1602년 곤여만국전도(마테오리치, 이지조 작)라는 목판세계지도를 만들면서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곤여만국전도는 숙종치세(1674~1720)때 조선에 전해지게되면서 이와함께 다양한 새 문물들이 들어오게 되는데 서학이란 이름으로 들어온 천주교가 대표적인 예시였다. 정조는 새로운 문물이나 문화, 예술등에는 수용하는 측면에서는 자유로웠지만, 새 사상에대해서는 극히 경계했던 것 같다. 천주교를 사학으로 보고 배척하게 된다.
그 배척의 첫 시작사건은 1791년 신해박해로서 조선 최초의 천주교 박해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 때 천주교 신자였던 권상연, 윤지충이 처형된다. 이 사건으로 천주교를 반대하던 노론(전통 주자학 지키자)이 힘을 얻게되고 소론(새로운 학문적 개혁을 하자)으로 나뉘었던 정국이 노론에 힘이 쏠리게 된다.
생몰년도 | 내용 | |
권상연 야고보 | 1751~1791 | 고모상때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뤘다는 죄목으로 순교 |
윤지충 바오로 | 1759~1791 |
정약용(1762~1836)또한 가족 모두가 천주교 신자로서 대신들의 공격을 받을 때 정조가 감쌌는데, 1795년 청나라 천주교 사제 주문모 신부(1752~1801)가 조선에 밀입국한 사건이 적발되면서 정약용도 탄핵을 받아 외직으로 물러나게 되고, 같은 계열이던 남인 채제공(1720~1799)또한 난감하게 된다.
규장각
할아버지 영조가 백성들을 위해 많은 서책들을 발간했던 모습을 그대로 지켜본 정조로서 역시 많은 서적을 간행게끔 하고 또 많은 서적을 스스로 썼다. 조선 최초의 국립 도서관인 규장각이 정조의 치세때 세워진다.
편저 | 편찬년도 | 내용 | |
대전통편 | 김노진, 엄숙, 정창순, 이가환 | 1785 | [경국대전], [속대전]이후 현행법령을 증보해 편찬한 조선의 법전 |
증보동국문헌비고 | 이만운 | 1797 | 영조의 동국문헌비고를 증수, 보완한 서적 |
동문휘고 | 정창순, 이숭우, 정창성, 홍양호, 이재학, 홍병찬, 이도묵, 김계환, 김윤서, 최기령 | 1788 | (청나라, 일본과의 교섭에 대한)외교문서 정리 |
탁지지 | 박일원 | 1788 | 호조의 옛 사례들을 모아 기록한 서적 |
무예도보통지 |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 | 1790 | 병법서(의궤, 군사훈련) 또는 무술교본 |
추관지 | 박일원 | 1791 | 형조의 사례를 모아 엮은 서적 |
규장전운 | 이덕무, 윤행임, 서영보, 남공철, 이서구, 이가환, 성대중, 유득공, 박제가 | 1796 | 한글의 음운 정리 |
송자대전 | 정조의 왕명으로 간행 | 1787 | 송시열의 문집 정리 |
홍재전서 | 정조 | 1799 | 정조 자신이 스스로 글을 정리한 사적 문집 |
이충무공전서 | 정조의 왕명으로 간행 | 1795 | 충무공 이순신의 문집을 정리한 서적, 완성 후 정조가 내탕금으로 인쇄비용을 충당함. |
춘관통고 | 유의양 | 1788 | 예조에서 관장하는 예제, 예무를 총정리한 서적 |
태학지 | 민종현 | 1785 | 성균관의 제도, 교과, 학생생활등에 관한 내용 기록 서적 |
존주휘편 | 이의준 | 1800 | 춘추대의를 선양하기 위한 사례들을 모아 간행한 정책서 |
**드라마 무사 백동수의 주인공 백동수이다
승하
정조는 1790년대 말, 1800년에 가까워지면서 건강이 점점 안좋아지기 시작하는데 1800년에 들어서는 수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태가 되면서 혼수상태에 빠져 48세로 승하.
묘호는 정종이였으나 고종(1852~1919, 재위1863~1907)대에 정조로 격상.
정조 묘호의 의미는 올바름으로 모든 사람을 감복시켰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