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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숙종(조선)

Mintaka5 2024. 8. 2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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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jong de Joseon, 1661~1720, 재위1674~1720

숙종 어진. 1954년 부산 용두산 대화재로 소실됨.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661년 조선 한성부 경희궁 회상전에서 아버지 현종(1641~1674, 재위1659~1674)과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1642~1684)사이에서 적장자로 태어남. 본명은 이용상→이광→이순 (이광이라는 이름이 수양제 양광과 이름음자가 같다는 이유로 순으로 개명) . 

 

배경

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지는 무려 3대 적장자 루트(삼종 혈맥)의 3번째 군주이다. 후에 둘째아들 연잉군(21대 영조, 1694~1776, 재위1724~1776)의 왕위를 계승하는 정당성 보증수단이 된다. 내용과는 별개로 숙종이 조선의 역대군주중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3대가 적장자인데 숙종은 심지어 현종의 첫째자식이자 장남이자 적장자라는 어마무시한 정통성을 가지고 즉위를 하였기 때문에 숙종에게는 정통성으로는 단종과 비등할 정도로 엄청나서 신하들 누구도 숙종을 건드릴 명분이 없었던 것. 46년간의 긴 재위기간동안 강력한 왕권을 자랑하며 신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였지만 백성들문제에 있어서는 아주 신경을 많이 쓰고 도와주었다고 한다. 숙종은 역대 조선 임금중 야간에 평복을 하고 궁을 몰래 빠져나와 암행을 가장 많이한 군주로서 백성의 고충을 듣고 해결해주었다는 야사가 전해지고 있다.

 

까딱 잘못하면?

  생몰년도 비고
숙종 1661~1720, 재위1674~1720 조선19대 국왕
명선공주 1659~1673 맹만택과 가례치르기 전 천연두로 요절
명혜공주 1663~1673 신요경과 가례치르기전 요절
명안공주 1665~1687 오태주와 정혼. 22세로 사망

위와같이 숙종은 독자로서, 누나한명, 여동생2명이 있었다. 숙종은 어려서 병약해서 혹시나 일찍 죽을까봐 현종과 명성왕후가 많이 걱정했다고 한다. 1667년 세자책봉.

1674년 아버지 현종이 33세로 갑자기 급서하면서 즉위하게 되는데, 즉위당시 13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직접 통치를 한다....! 모후 명성왕후의 친정반대를 뿌리치면서까지 친정을 시작하게 된 것. 이런 강단이 앞으로의 숙종치세에 많이 나타나게 될 것이니 지켜볼 것.

 

재위

1674년 19대 숙종으로 즉위한 이후 맞닥들인 정계의 현실은 여전히 논쟁진행중. 제일 먼저 맞닥들인 논쟁은 갑인예송(1674)으로서, 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 장씨(1619~1674)의 국상에 인조(1595~1649, 재위1623~1649)의 계비인 자의대비(인조와29살 차이, 1624~1688)가 입을 상복을 두고 일어난 예송 사건. 인선왕후의 시어머니인 자의대비가 며느리의 상에 입을 상복을 두고 혼란이 올만했다. 

경국대전에서 예송 [의례] 분류 [의례]상복착용기간
기년복 인선왕후가 첫째아들(소현세자)의 며느리라면 자의대비는 기년복을 입어야 함 대공 9개월
대공복 인선왕후가 둘째 아들(효종)의 며느리라면 자의대비는 대공복을 입어야 함 소공 5개월

며느리가 사망했을 때에 유교경전 [의례]에서는 위의 표같이 기년복과 대공복이 대공 소공으로 분류되어 정해져 있었다. 효종(1619~1659, 재위1649~1659)을 장자(첫째)로 볼것인지 중자(둘째)로 볼 것인지가 핵심 논쟁사항이 되었다.

 

 

니들 쓸려보고 싶나?

이렇게 시끄러운 일(갑인예송)에 서인의 주축 김석주(1634~1684)가, 이미 이전 광해군때부터 시행된 대동법(세금제도)이 양반과 지주들의 반대로 경기도지역에서만 시행되던게, 숙종이 전국(평안도, 함경도, 제주도 제외)으로 확대하려고 하게되면서 이게 또 논란이되면서 찬성파 반대파로 또 나뉘어서 논쟁이 일어나게 된다. 

  대동법 확대 찬성파 대동법 확대 반대파
I 서인 김석주,  1634~1684 서인 송시열,  1607~1689
II 남인 허적,  1610~1680 서인 김수항,  1629~1689
III 서인 김우명, 1619~1675 서인 김수흥, 1626~1690
IV 남인 윤휴, 1617~1680 서인 정지화, 1613~1688
V 남인 허목, 1596~1682 서인 민유중, 1630~1687

김석주는 서인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남인 허적과 손을 잡아 대동법 반대파 송시열, 김수항등 서인들을 몰아내어버린다. 그렇게 남인들이 정권을 잡게되고, 대동법 찬반파와 더불어 갑인예송에서는 김석주가 남인과 연계해서 효종비 인선왕후를 장자부로 보고 기년복에 찬성한다.

거기다가 남인 허적, 윤휴를 중심으로 북벌론이 다시 계획되면서 김석주역시 지지의사를 표하면서 남인과 서인의 당론이 일치하게되면서 정치적 통합이 일어나게 되지만 남인 영수이자 강경파였던 허목(1596~1682)이 대국 청나라와 감히 상대가 되겠냐며 강하게 반대하여 남인 강경파가 강하게 나오게 되면서 북벌론은 그렇게 묻힌다.

 

경신환국

남인이 2차 예송논쟁(갑인예송)에서 승리하고 정권을 잡고 당시 영의정 허적이 도체찰사(8도군사통제직책)까지 겸임하게 됨으로서 권력의 저울이 흔들리게되면서 숙종은 균형을 맞추기위해 서인이자 외숙부(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의 사촌오빠)인 김석주(1634~1684)를 부체찰사로 천거. 영의정 허적이 조부 허잠의 시호를 숙종으로부터 받고 기념식을 거행할 때, 궁의 허락을 받지않고 천막을 빌린 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숙종이 크게 분노하게 되는것과 더불어 허적의 서자인 허견(1646~1680)이 인평대군(1623~1658)의 세 아들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과 결탁해 복선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역모를 꾀하고있다는 서인의 고변(삼복의 옥)으로 숙종은 경신환국(1680)을 단행하게 된다. 

숙종은 경신환국을 통해 남인주도 정국에서 서인으로 대거 교체해버린다.

 

노론의 탄생

김석주는 갑인예송때 남인과 손잡고 송시열등을 몰아내는데 성공하고 서인과 남인의 연립정권(연정)이 탄생하지만, 1683년 김석주가 남인과의 연정을 깨고 권력을 독점하기위해 김익훈(1619~1689)과 짜고 남인들을 역모로 몰았다가 오히려 서인들이 이에 찬반이 갈리게 되면서 남인이 역모를 저질렀다는 찬성파(노론)과 역모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반대파(소론)으로 분당되게 된다.

  노론 소론
I 김석주, 1634~1684 윤증, 1629~1714
II 송시열, 1607~1689 남구만, 1629~1711
III 김익훈, 1619~1689 박세채, 1631~1695

 

기사환국

이번엔 경신환국과는 비교가되지 않을만큼 광풍이 몰아치는 환국이다. 배경은 1689년 소의 장씨(장희빈, 1659~1701)의 소생 윤(20대 경종, 1688~1724, 재위1720~1724)을 원자로 삼고 소의 장씨를 정1품 빈에(희빈) 봉하려고 하는 숙종에게 당시 두번째 왕비인 중전 인현왕후 민씨(1667~1701)가 비록 혼인후 6년간 아이가 없었지만, 아직 22세로 젊으니 좀 더 기다리자고 정면으로 반대를 외친다. 

결론적으로 숙종은 서인의 주장을 쌩까고 아들 윤을 원자로 책봉하고 소의 장씨를 희빈으로 책봉을 강행하게 된다(1690). 숙종은 게다가 원자책봉후 서인쪽 왕비였던 인현왕후를 폐위, 폐출시키기에 이르는데, 송시열의 상소에 분개하여 파직시키고 제주도에 유배한후 사사시킨다. 같은 의견을 따랐던 서인 대표주자들 역시 파직당하고 유배보내진다.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희빈 장씨는 중전이 되고 원자 윤은 왕세자에 책봉되게 되면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갑술환국

3번째 환국이다. 1694년(숙종20년)에 벌어진 갑술환국은 이미 기사환국이 끝난이후부터 그 조짐이 시작되었다고 봐도 되는데, 중전 장씨(장희빈)에게 장희재(1651~1701)라는 오빠가 있었는데, 깨끗한 인물은 아니였고 뇌물수수등과 민암(1636~1694)과 결탁하여 장희재가 숙종에게 이사실을 알리며 사직을 표시하는데, 숙종은 걱정하지말라며 오히려 다독인다. 이때가 갑술환국이 시작된 날로서 남인이 대거 잡혀들어가는 날이였다. 1694년 4월 1일(만우절드립 사절).

그러나 숙종은 10일뒤 돌연 장희재에게 직권남용의 죄목을 씌워 삭탈관직후 체포해버린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대한 이유는 숙종이 장희재를 체포한 날 폐비 민씨(인현왕후)를 수행할 것을 명하게 됨으로서 인현왕후 복위준비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다음날 4월 12일에 바로 인현왕후는 복위되고, 중전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킨다. 

  인현왕후 복위 찬성파 (노론) 인현왕후 복위 반대파 (소론)
I 병조판서 서문중, 1634~1709 우의정 윤지완, 1635~1718
II 이조참판 박태상, 1636~1696 공조판서 신익상, 1634~1697

그러나 이 일에 반발한 소론은 모두 사직상소를 올리게 되면서까지 초강수(당시 정계인사 대부분이 소론)를 두며 숙종을 반협박하지만 소론 영수 영의정 남구만(1629~1711)이 '이미 왕명은 내려졌고, 자식이 어미를 쫓아내라 마라 할 수 없다는'논리로 중재시키며 인현왕후를 복위하는쪽으로 결론을 내게 된다.

 

무고의 옥(신사의 옥)

희빈 장씨가 중전에서 강등되고 취선당으로 거처가 옮겨진 뒤 그곳에서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사건이 1701년 터지게 된다. 배경은 1696년 남인들이 서인을 몰아내기위해 희빈 장씨의 아버지 역관 장형(1623~1669)의 무덤을 파헤치는 장형의 무덤 방자사건이 터지게 되는데, 장희재가 자작극을 벌인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처형될 위기에 쳐해졌다가 소론의 변호로 목숨은 부지하게 된다만..

1701년 인현왕후가 지병으로 병사하면서 인현왕후의 국상이 준비됨과 동시에 희빈 장씨를 다시 중전으로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이 감지되는 이때 후궁인 숙빈 최씨(21대 영조의 어머니, 1670~1718)가 희빈 장씨가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차려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고변하면서 인현왕후가 희빈 장씨의 저주로 시해당한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희빈 장씨는 왕세자 윤(20대 경종, 1688~1724, 재위1720~1724)이 두창에 걸려 쾌유를 기원하기위해 설치했다고 주장한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한 내용은 없고, 이때 사건조사당시 증거부족, 고문으로 인한 증언 신빙성 문제등이 현재까지도 의혹이 제기되는 계기가 된다.

숙종은 이때 1701년 이미 제주도에 유배가있던 장희재에게 처형을, 희빈 장씨에게는 자진을 명한다. 이때 궁인, 무녀등도 처형된다. 무고의 옥에서 무고는  '무술이나 방술 따위로 남을 저주하는 일' 이다.

 

조선판 루이13세(절대왕권 기틀마련)+루이14세(짐이 곧 국가다)

숙종은 14대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가 취했던 붕당을 교체하는 방식으로서 여러차례 환국을 벌이면서 정권을 계속 교체시킨다. 환국으로 인해 집권한 붕당과 물러난 붕당은 숙종의 통제아래 언제 또 목이 날라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대한 경쟁을 하여 상당히 긍정적인 쪽으로 정책대결이 가속화되면서 왕권강화와 국가발전을 동시에 취하는 계기가 된다.

대동법(세금)확대 실시, 화폐 주조(상평통보)등으로 국가를 살찌우고 상업을 발전시켜 GDP를 증대시킨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대기근등을 겪으면서 혼란스러웠던 조선을 안정시키고 임진왜란 이전의 수준으로 돌려놓는 성과를 취하게 되면서 사실상 조선중후반 중흥기(숙종-경종-영조)의 바탕을 마련한 군주라고 할 수 있다.

 

승하

아무리 절대권력의 숙종이라도 나이가 들었고 병에 노환(58세)이 겹치면서 1720년 승하한다. 묘호는 숙종.

 

고양이

추가적으로 숙종은 신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였지만 동물을 좋아했고, 특히 길고양이를 많이 아껴 금손이라는 이름을 붙여 항상 나랏일을 볼때나 식사할때나 취침할때나 같이 다녔다고 한다. 숙종이 승하하고 금손이라는 고양이도 음식을 먹지않고 앓다 죽게되니,  신하들이 가여이 여김과 동시에 놀랍게 여겨 숙종 곁에 묻어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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