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 앙리4세(Henri IV 'le grand', 1553~1610, 나바라재위1572~1610, 프랑스재위 1589~1610)

출생
1553년 나바라왕국 누벨아키텐 포(Nouvelle Aquitaine Pau)에서 아버지 앙투안 드 부르봉(Antoine de Bourbon, 1518~1562)과 어머니 나바라 여왕 잔 달브레(Jeanne d'Albret, 1528~1572)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잔 달브레는 발루아-앙굴렘가문출신 프랑스군주 프랑수아1세의 조카이다(잔 달브레의 어머니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 1492~1549)가 프랑수아1세의 친누나임).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는 3명이 있는데 헷갈리지 않기 위해 아래 표에 정리해두었다.
설명 | |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 1492~1549) | 프랑수아1세의 누나 |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 1523~1574) | 프랑수아1세의 딸, 앙리2세의 여동생 |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 1553~1615) | 앙리2세의 딸, 앙리4세의 남편, 프랑수아2세, 샤를9세, 앙리3세의 여동생, 별명-'마고여왕' |
우리나라의 대왕이라하면 바로 누구든 세종대왕을 떠올릴 것 처럼 프랑스에서도 대왕하면 두명이 떠오를것이다 앙리4세와 루이14세(이분은 그냥 너무 강력하셔서 대왕별칭과 동시에 태양왕)가 떠오른다고 할 것인데, 앙리4세가 프랑스인들이 자타공인하는 대왕이라고 할 수 있겠다(재위 중 업적을 많이 남김).
슬리데린급 혈통
앙리4세는 부계로나, 모계로나 아주 끝내주는 혈통으로 아버지 앙투안 드 부르봉(부르봉 가문)에서 부르봉 가문은 쭉쭉 역사를 타고 올라가서, 성왕 루이9세(Louis IX 'Saint', 1214~1270, 재위1226~1270)의 아들 로베르 드 클레르몽(Robert de clermont, 1256~1317)이 초대 부르봉 백작으로서 시조가 되며(루이9세 직계), 어머니 잔 달브레 또한 나바라 왕가를 따라 올라가면 루이10세(Louis X, 1289~1316, 재위1311~1316)가 나온다. 부계 모계 모두 프랑스 혈통인 셈으로 앙리4세의 7촌인 프랑스 왕 앙리3세(1551~1589, 재위 1574~1589)가 암살당하고, 앙리4세가 프랑스 왕이 되는데, 이러한 집안배경이 딱 맞아 떨어져서 프랑스 왕이 될 수 있었다.
마고여왕과 결혼
1570년부터 앙리4세의 어머니 잔 달브레와 프랑스 앙리2세의 왕비였고 대비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1519~1589)간에 혼담이 오가는데, 앙리4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딸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마고여왕'(Marguerite de Valois, 1553~1615)와의 혼인이 성사된다. 참고로 마고여왕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는 앙리4세의 외할머니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프랑스 왕 프랑수아1세의 누나)와는 다른 인물로써 편의상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딸은 마고라 부르겠다(굳이 따지자면 둘은 큰할머니-손녀지간임). 카트린 드 메디시스 입장에서도 자식들에서 대가 끊기면 자연스럽게 앙리4세에게로 프랑스 왕위가 넘어갈 것을 알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 발루아 가문출신 군주의 대가 끊기지 않기위해 딸과 혼인을 기획했을 것이다. 아무쪼록 두 남녀가 1572년 결혼을 하게되어 앙리의 어머니 나바라 여왕 잔 달브레가 파리에 먼저 가서 있게 되는데, 그녀는 호흡기질환으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아서 앙리4세가 나바라의 군주로 즉위를 하게된다. 근
바르톨로뮤 대학살
잔 달브레가 사망한 후 앙리4세와 마고여왕과의 결혼식에서 이미 앙리2세 게시글 부분에서 나왔던 당시 프랑스 실세 기즈가문(Maison de Guise)과 위그노였던 콜리니 제독(Gaspard II de Coligny, 1519~1572)을 암살하고자 결혼식에 매복시키는데 사건이 커져버려 두 남녀의 결혼식에 참석한 위그노 전체를 죽이는 일로 커짐과 동시에 파리전역에 위그노들이 암살당하게 되면서 이때 수만명이 그야말로 학살을 당한다. 이것이 바르톨로뮤 대학살이다.
세 앙리의 전쟁
바르톨로뮤 대학살 이후 나바라의 왕이자 위그노측 수장인 앙리 드 나바라(미래의 앙리4세)와 프랑스 왕 앙리3세, 그리고 기즈가문의 앙리 드 기즈(Henri de Guise, 1550~1588)등 3명의 앙리(Henri)가 1584년 격돌하게 된다. 이는 1584년 9월, 앙리 드 기즈가 위그노인 앙리 드 나바라를 축출할 목적으로 카톨릭 동맹을 만들면서 당시 현직 왕이였던 앙리3세를 위협할만한 세력을 가지게 된다. 이에 위기를 느낀 프랑스 왕 앙리3세는 앙리 드 기즈에게 중대한 사항을 논의하기위해 그를 블루아 성으로 부르게 되는데, 이미 성 내부에 자객을 숨겨놓은 앙리3세는 앙리 드 기즈가 자신이 있는 알현실에서 자객들로하여금 앙리 드 기즈를 살해하게 된다. 이러한 일로 인해 카톨릭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게되는 앙리3세는 위그노였던 앙리 드 나바라와 손을 잡고 연합을 하지만, 1589년 8월 앙리3세역시 암살당하면서 앙리 드 나바라가 프랑스왕 앙리4세로 추대받게 된다.
종교전쟁 마무리
앙리4세는 1589년 프랑스 왕으로 등극한 후에도 신교도의 맹주로서 견제를 받고, 왕권을 강화시키기위해 노력을 하게되는데, 이과정에서 프랑스인들을 위해 카톨릭으로 다시 개종을 하여 프랑스인들에게 사실상 민심을 얻으면서도 주변국 영국의 엘리자베스1세(Élisabeth I, 1533~1603,재위 1558~1603)로서는 경악을 금치못하고(영국은 신교국가) 지원을 모두 차단당함. 그래도 어차저차 내실을 잘 꾸려나간 결과 1598년 그 유명한 낭트칙령(L'édit de Nantes, 1598, 설명: 프랑스 내에서 가톨릭,위그노(신교)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는 칙령)이 반포가 되면서 드디어 종교전쟁(1562~1598)이 막을 내리게 된다.
정비가 된 프랑스 : 다들1주일 1닭 콜? 어.... 앗 칼이다..
앙리4세는 1598년 종교전쟁을 잠식하는 낭트칙령(1598)발표 이후 36년간(1562~1598)의 위그노 전쟁으로 황폐해진 프랑스의 복구에 힘을 쓴 결과, 프랑스 동쪽에 있던 거대한 합스부르크 신성로마제국에 견줄만한 국력을 갖추게 된다. 당시 프랑스의 명재상 쉴리(막시밀리앙 드 베튄,Maximilien de Béthune, 1559~1641)와의 환상의 콤비로, 그 유명한 매주 일요일 저녁엔 프랑스 국민 모두 닭요리를 먹을 수 있게하라라는 명언을 남긴다. 이때부터 프랑스 국민의 뇌리에 앙리4세=좋은 왕이라는 인식이 심어진 것 같다(어떤국가의 국민이든 왕이 누구냐보다 굶지않고, 배부르게 해주는왕이 최고). 그러다가 프랑스 왕으로 재위한지21년이 지난 1610년 5월14일, 앙리4세는 재상 쉴리를 만나러 가는 와중에 카톨릭광신도 프랑수아 라바이약(François Ravaillac, 1578~1610)에게 칼로 여러번 찔리면서 암살을 당하게 된다. 갑자기 왕이 암살되자 혼란이 오는건 당연했고 이는 왕실에서도 바로 왕을 옹립해야 했던 상황이였는데, 9살의 어린 장남 루이13세(Louis XIII, 1601~1643,재위1610~1643)가 왕위에 오르게되면서 명목을 이어나가게 된다(루이13세 글 참조).
대왕의 별명
이분 여자 많이 밝혔고, 정부가 50명이나 된다. 물론 당시에 군주에게 정부를 두는게 문제는 아니지만 50명은 상당한 숫자로 놀랍다. 알아서 생각들하길 바라며 대왕의 또다른 별명은 '호색한'(le vert galant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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