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is XV(1710~1774, 재위1715~1774)
출생
1710년 베르사유궁(Château de Versailles)에서 루이 드 프랑스 '쁘띠도팽'(Louis de France 'petit dauphin', 1682~1712)과 마리 아델라이드 드 사부아(Marie adélaïde de Savoie, 1685~1712)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남.
공작부인 마담 드 방타두르(마담 드 퐁파두르 아님)
맏형 브르타뉴 공작 루이 드 프랑스(Louis de France, 1704~1705, duc de Bretagne)가 태어난지 10개월만에 죽고, 둘째 형 루이 드 프랑스(Louis de France, 1707~1712, duc de Bretagne, dauphin de France)도 도팽이 된지 2달만에 당시 왕가를 휩쓴 천연두에 걸려 사망해버리고, 3남이자 루이15세가 되는 루이 드 프랑스(Louis de France futur Louis XV, 1710~1774, 재위1715~1774)마저도 천연두에 걸리게 되는데, 사혈치료(피를 다 뽑아내어 바이러스를 없애는 치료)가 당시에 가장 효력있는 치료법이였는데, 알다시피 사망률이 매우높아 위험한 치료방법중 하난데, 차남 루이 드 프랑스(1707출생)또한 사혈치료도중 죽어버려 이제 3남밖에 직계 계승자가 남지 않은 상황이였는데, 만약에 이 루이가 죽었다면 오를레앙가문으로 왕가가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루이15세가 되는 루이 드 프랑스는 고위귀족 공작부인이자 가정교사인 마담 드 방타두르(Madame de Ventadour, 1654~1744)가 사혈치료를 강력하게 반대하며 지극정성으로 루이15세를 케어 한 결과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방문을 걸어잠그고 사실상 시위를 한 셈. 사실상 루이15세와더불어 부르봉왕조 직계는 방타두르 공작부인이 살려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우짤꼬..?
루이14세 게시물에서도 설명했듯이, 루이14세(Louis XIV, 1638~1715, 재위1643~1715)는 동생 필리프 도를레앙1세(Philippe d'Orléans I, 1640~1701)와 그의 아들 필리프 도를레앙2세(Philippe d'Orléans II, 1674~1723)을 매우 경계했는데, 직계 자손들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증손자 루이 드 프랑스(1710~1774)가 너~무 어려서 결국 본인이 죽으면 누군가가 섭정이되어 통치를 이어나가야하는데, 당시 살아있던 왕실 종친계 최고어른이자 루이14세의 조카가 되는 필리프 도를레앙2세가 왕위계승에서 가장 가까운 고위귀족이였기에, 어쩔 수 없이 루이15세가 재위에 오를 때,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으로서 국정운영을 하라는 명령서이자 유언을 비밀리에 남기게 됨(찝찝하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걱정이 된 루이14세가(필리프 도를레앙2세는 권력욕이 강했음.) 권력독점을 막기위해, 적통으로 인정한 루이14세의 두 서자인(마담 드 몽테스팡의 두 아들,Madame de Montespan,1640~1707) 멘 공작 루이 오귀스트(Louis-Auguste de Bourbon, 1670~1736)와 툴루즈 백작 루이 알렉상드르(Louis-Alexandre de Bourbon, comte de Toulouse, 1678~1737)에게 공동 위임통치를 하게 함.
삼촌 잘 부탁합니데이
1715년 9월1일 루이14세가 사망하면서, 어린 루이 드 프랑스가 루이15세(Louis XV, 1710~1774, 재위1715~1774)가 왕위에 오르고, 루이14세의 유언대로 필리프 도를레앙2세(Philippe d'Orléans II, 1674~1723)가 섭정(le régent)에 등극하게 되는데, 8년간의 섭정기(Le régence, 1715~1723)는 삼촌 루이14세로부터 막대한 부채를 받아 경제문제에 누구보다도 전념했는데, 증권거래소와 화폐를 처음 도입한 시기이기도 함. 어찌저찌 해결이 잘 안되고, 더 궁핍해져가는 국민과 귀족간의 계층차이가 더 벌어지고 이때부터 상류층의 사치와 향락이 더욱 커지는 시기가 되는데 로코코문화가 여기서부터 드러나게 된다 해도 과언이 아님.
이쟈 내 세상이제? 아.. 똑똑하시네예 여기..
1723년 섭정이자 삼촌 필리프 도를레앙2세(Philippe d'Orléans II, 1674~1723)가 사망하나, 아직 13세 미성년의 루이15세였기에, 사실상 아직 전권을 행사하기엔 이른 시기였는데, 섭정기 시기 플뢰리 주교(André Hercule de Fleury,1653~1743)로부터 교육을 받고 자랐는데, 성품도 좋고 머리도 좋은 플뢰리를 계속 두다가 성년이되고 바로 플뢰리를 재상으로 임명. 1743년 플뢰리가 사망할 때까지 루이15세 재위기간중 제일 안정되고 인기좋고 전성기시기가 지속되게 됨.
이쟈 내 세상이네...
1743년 플뢰리 죽음 이후 직접 스스로 통치하겠다고 선언하고(이때까지만 해도 국민들에게 인기절정) 이게 또 쉽게 통과가 되어 잘 하나 싶었는데, 이제 앞으로 유럽역사가 좀 복잡해지는 전쟁들이 끼이게 됨.
1740~1749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이 계승하는데 대한 문제)
1756~1763년 7년전쟁
특히 7년전쟁(1756~1763)은 유럽의 대전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규모가 큰 대전쟁이였다. 개입을 하고, 이득을 잘 취하는 것도 아닌게.. 점점 프랑스의 국력은 쇠퇴해가고 프로이센같은 신흥국가들이 떠오르게 되는 계기가 됨.
마담 드 퐁파두르(마담 드 방타두르 아님)
루이15세는 2세시절(1712년) 아버지와 어머니를 천연두로 모두 잃게되는데, 부모없이 자란 아이가 크면 어떻게 되는지는 다들 잘 알거라 본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집착이 연인에게 적용하게 되는 아주 좋은 사례인데, 사실상 루이15세위에서 실질 통치를 한 애첩 마담 드 퐁파두르(Madame de Pompadour, 1721~1764)가 그 주인공이다. 1745년부터 루이15세의 애첩이 되며 사실상 권력을 쥐고 흔드는데, 1764년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의 권력의 중심에 서 있게 됨.
그런 루이15세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퐁파두르 부인에게 전달이 된 거 같다(참고로 애첩 1명 아님.). 심지어 가슴 크기에 집착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도 인성은 좋았던 편이라고 하는데, 군주로서는 보기 힘든 섬세함이 묻어나는 것 같다(그래도 삐뚤어지지 까진 않아서 다행..?).
죽음.. 아 당연히 왕비는 있지요
루이15세의 왕비이자 폴란드 왕녀였던 마리 레슈친스카(Marie Leszczyńska, 1703~1768)가 언급되어있지 않아 섭섭했을 것이다. 이 왕비는 1725년 7살 연하 루이15세에게 시집오게 되며(섭정 오를레앙공 필리프가 계산을 하다가 찾은 왕비감.. 실제로 폴란드 왕실은 매우 열악한 상태였고 다산이 풍습이였음) 잘 지내나 싶었지만, 루이15세 스타일은 아니였나 보다.
루이15세는 톡톡튀고 도도한 여자를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리는 그에비해 얌전하고 독서를 좋아하고 헌신적이기까지 해서 그랬는지 루이15세가 질려버려서.. 그때부터 애첩 마담들이 줄줄이 등장하게 됨. 평생 불만이 있었지만, 최대한 조용히 살려고 노력했는 듯 하다. 1768년 마리는 조용히 사망.
죽음(루이15세)
마리가 1768년 죽고 루이15세는 불안증 증세를 겪으며, 몸이 급격하게 쇠약해져 가는데..1774년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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