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해전, 1597
배경
1597년(선조30년)에 다시 재발한 정유재란 당시인 1597년 10월 26일(음력9월16일)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1545~1598)의 지휘를 받는 조선 수군이 왜 수군을 명량 해협에서 대파시킨다. 명량 해전 이전의 조선 수군은 1597년 8월 27일에 벌어졌던 칠천량 해전에서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1540~1597)이 전임 통제사 이순신을 모함하여 능력도 되지않고 전략적 판단도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왜군이 부산에 집결했다는 소식에 조정의 공격 압박을 받아 준비도 별로 되지 않은상태에서 어찌저찌 출정하다가 지휘력 부족과 왜군의 교란작전에 휘말려 90%이상의 전선을 잃어버리고 도망가다가 전사한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은 충격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도원수 권율(1537~1599)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에 있던 이순신(1545~1598)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시킨다. 칠천량해전당시 참전했던 배설(1551~1599)이 12척의 전선을탈출시키고 일반백성들이 배1척을 가져옴에 따라 조선 수군에게 남은 전선은 13척이였다. 이순신은 이러한 상황에 개의치 않고 서해쪽 길목을 지키기 위해 물살이 매우 센 지형인 벽파진(현 전라남도 진도군 벽파리)으로 이동하지만, 명량을 두고 벽파진을 지키는 것이 앞뒤로 적을 맞을 수도 있다는 판단 하에 명량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칠천량해전 대패
I. 원균
1597년 3월, 명나라와 왜국간의 강화협상이 결렬됨에 따라 왜군이 다시 조선으로 쳐들어오는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된다. 이번에는 임진왜란 초기당시 2군 사령관으로 배속되었던 가토 기요마사(1562~1611)가 이번엔 1군 사령관으로서 선봉대가 되어 경상도를 치는 우군(좌군은 전라도)이 되어 부산을 재침한다. 왜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1537~1598, 관백재위1585~1592, 태합재위1587~1598)는 하삼도(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를 점령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미 이전의 침입으로 일부러 도로를 놓지않은 조선의 길에 왜군들은 강과 바다를 통해 군수품을 수송할 수 밖에 없던 상황이라 바다에 대한 제해권이 이전보다 더욱 중요해진다. 이러한 상황에 왜에서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1545~1598)을 모함하고, 마침 이순신에게 감정이 있던 원균(1540~1597)이 이순신 모함에 동참하게 되면서 이순신이 관직이 삭탈되고 수도 한양으로 끌려간다. 그렇게 조정에서는 이순신 대신에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게 된다. 원균은 무조건 왜군을 격파하겠다고 주장하고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음을 인지하고 육군의 도움없이는 출전할 수 없다고 계속 발뺌을 한다. 그렇게 계속 출전의지도 없었던 원균이였는데, 소수의 왜적만 보고도 도망치기 급급할 정도였다.
II. 패전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1597년 8월26일 100여척의 판옥선과 1만이 넘는 수군병력을 동원해 기상, 지형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왜군을 쫓기만 하다가 10척이 넘는 판옥선을 잃어버리고 게다가 왜군의 반격을 받아 다량의 판옥선이 대파되는등 이미 원균의 지휘력에 대한 의심이 가득찬 상태였다. 그렇게 칠천도쪽에 정박해있다가 왜 수군의 야습을 당하고 계속 당하기만 하면서 후퇴를 거듭하다가 이런 헛짓거리에 부하였던 순천부사 우치적(1560~1628)은 탈출에 성공하고 경상우수사 배설(1551~1599)은 전선12척을 가지고 도망치기에 이른다. 칠천량의 결과는 대패였고 원균은 부하와 함께 도망치다가 왜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고 100여척의 전선 대부분을 잃게 되면서 조선 수군이 사실상 궤멸되어버리면서 조선 남해안에 대한 제해권이 왜군에게 가버린다.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그렇게 원균은 대패와 동시에 사망하고 조선 수군이 궤멸되어버리자 조선 조정에서는 도원수 권율 휘하에 백의종군한 이순신을 다시금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한다. 그러나 복직되고 보니 수군은 경상우수사 배설이 남겨둔 12척이 전부였는데, 이 병력으로 왜군과 맞서기 어렵다 하여 조정에서는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으로 배속시키게끔 명을 내리지만 이순신은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있고 자신이 죽기 전엔 왜적이 수군을 만만히 볼 수 없을 것이란 결의를 하여 조정에서도 어쩔 수없이 수군을 존속시키게 된다.
명량 해전
I. 울돌목
이순신은 1597년 10월 9일 전선을 벽파진(현 전라남도 진도군 벽파리)에 위치시켜 왜군의 서해진출을 막고자 지켜보는데, 명량 울돌목을 두고는 앞뒤로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상황에 울돌목쪽으로 옮긴다. 이곳은 벽파진보다 폭이 훨씬 좁았고 유속도 매우 빠른 지형에다가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 특성이 적용되어 밀물과 썰물이 교차할 땐 급류가 치기도 하는 곳이였다. 이순신은 조류가 바뀌면서 급류가 휘몰아칠 때 왜군을 포위시켜 모든 화력을 쏟아붓고자 하는 계획을 하여 울돌목 좁은 수로에 13척(12척+1)으로 일자진을 치고 전투를 벌이는데 왜 수군의 병력은 130여척의 전선과 수천에 달하는 병력을 가졌어서 이러한 차이에 안그래도 조선 수군 내에서도 동요가 일어났었는데 거기다 조류의 방향이 수시로 바뀌는 울돌목의 특성상 전선이 뒤엉키면서 더욱 혼란이 발생함에 따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이에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1561~1597)의 목을 베어 조선 수군의 사기를 높이고 왜 수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면서 더욱 공격을 퍼붓게끔 한다. 사기가 높아진 조선 수군의 화력에 왜군은 전선31척이 완전히 분파되어버리면서(난중일기 기록) 도주하게 된다. 조선측의 피해는 단1척도 피해를 입지 않은 대승이였다. 아래 표는 각 국 지휘관과 휘하 장수들(모두 다 언급하진 않았다)이다.
조선 수군 | 왜 수군 | |
지휘관 |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1545~1598) | 대장군 도도 다카토라(1556~1630) |
I | 김응함(1554~?) | 구루시마 미치후사(1561~1597) |
II | 안위(1563~1644) | 와키자카 야스하루(1554~1626) |
III | 김억추(1548~1618) | 간 마사카게(?~1597) |
IV | 배흥립(1546~1608) | 모리 다카마사(1559~1628) |
II. 결과
명량 해전이 조선의 대승으로 끝남에 따라 칠천량해전 패전이후 빼앗긴 조선 남해안에 대한 제해권을 다시 가져오게 된다. 그렇게 수송로가막힌 왜군은 더이상 북진을 할 수가 없어 북진계획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당시 왜군은 충청도 직산 근처까지 진군을 했던 상태였는데, 명량 해전의 소식을 듣고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하여 더이상 진격하지 않게 된다. 이 명량 해전의 결과가 정유재란의 판도를 바꿔버린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