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금대 전투, 1592
배경
조선 중기 임진왜란(1592~1598)당시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6월 7일, 도순변사 신립(1546~1592)이 이끄는 조선군이 선봉부대인 왜1군 고니시 유키나가(1558~1600)가 이끄는 왜군에 의해 '전멸'을 당한 전투이다. 양측 군대규모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는데(조선군 1만6천가량, 왜군 1만 8천가량) 주병력이 조선은 활을쓰는 기병 이였고 왜는 조총으로 무장한 군사로 화력차이에서부터 이미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에서 신립은 부하들의 작전모의에서도 평야전을 고집하여 보병으로 구성되었던 왜군을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가 조총의 화력을 이기지못하고 돌격기병들을 모두 총탄에 날리고 화력에 밀리면서 왜군 기동부대에 의해 충주성이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탄금대에서 갑자기 충주성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떠나버리는데 충주성에서도 막힌 신립은 우왕좌왕하다가 남은 병사들이 왜곡된 왜군의 병력숫자(20만)에 겁을 먹고 사기가 떨어져 왜군에 의해 강(달천강)가까지 몰리고 수천에 달하는 조선군이 강에 투신해버리면서 수장된다. 남은 생존자가 이일(1538~1601)을 포함해 4인에 불과했다고 한다.
발단
I. 임진왜란 발발
1592년 5월, 왜의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1537~1598, 관백재위1585~1592, 태합재위1587~1598)가 20만의 대병력으로 조선을 공략하기위해 고니시 유키나가(1558~1600)가 이끄는 왜1군 선봉부대가 부산 해안가에 나타난다. 발발한지 이틀만에 부산진과 동래성이 함락당하고 동래부사 송상현(1551~1592), 부산진첨사 정발(1553~1592)등이 왜1군과 교전중 패전당하고 살해당한다. 그렇게 파죽지세로 북진하는 왜군에 대해 조선 조정에서 대책을 마련하기위해 모든 대신들이 모이는데, 이전까지의 노략질 수준이 아닌 전쟁이라는 문제에 직면했었고 이에 경상도 도순변사 이일(1538~1601)이 파견되지만 상주 전투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하여 도망치기에 급급하고 상주성또한 왜군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
II. 신립
이에 1583년 니탕개의 난(1583)을 효과적으로 처리한 명장 신립(1546~1592)이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의 명에따라 방어임무를 맡게 되어 기마군을 이끌고 출정하게 된다. 그렇게 신립은 1만6천여명의 병력을 데리고 1592년 6월, 충주에 도착하는데, 이 때 상주성에서 패전하고 도주한 이일을 만나 세를 규합시킨다. 그렇게 지휘부는 전투 전 작전회의중에 총사령관 신립과 휘하 장수들간 의견차이가 벌어진다.
내용 | |
신립(1546~1592)의 논리 |
왜군은 보병이고 조선군은 기병이 주이니 기병을 이용한 전술을 구사해야할 필요성이 있으니 충주의 넓은평야로 적을 끌여들여 섬멸 하자. |
김여물(1548~1592)의 논리 |
새재에 있는 높은 바위를 방패삼아 궁병으로 기습공격하는 유격전을 구사하여 힘을 빼게 해야한다. |
이일(1538~1601)의 논리 |
한강으로 물러나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여 왜군을 방어하는 게 나을 듯 싶다. |
III. 충주 탄금대
왜1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1558~1600)가 이끄는 선봉부대는 상주성 점령 후 문경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신립은 1592년 6월 7일 충주에 진입했다는 정찰병의 보고를 받는다. 마침 왜2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1562~1612)가 이끄는 2만3천여명의 병력중 2천의 병력을 떼어 단월역에 매복하는 것을 이일(1538~1601)과 충주 목사 이종장(1544~1592)이 확인하지만 왜군의 감시망을빠져나가지 못해 이러한 사실이 신립에게 보고되지 않게 된다. 왜군은 단월역 앞 마을에 있는 민가에 불을 질러 조선군에 신호를 보내 신립이 이 신호를 보고 즉시 병사를 이끌고 탄금대로 진격한다. 왜군은 1만6천명의 조선군이 들어닥치게 되자 숫자 차이로 인해 당황하였고 조선군은 수적 우세를 믿고 승리를 확신하는 자만을 하게 된다.
IV. 고니시 유키나가
그러나 1군 고니시 유키나가는 당황하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나뉘어져 있던 군대를 비밀스럽게 접근시키며 조선군을 에워싸기위한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신립은 이러한 작전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고 오히려 숫적 우세를 활용해 학익진 형태로 왜군을 감싸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 다음 섬멸시킬 계획을 하고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직접 이끄는 7천여명의 병력은 조선군과 마주하며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이 때, 고니시는 분산되어있던 군사를 이용해 조선군을 좌, 우로 포위하여 조총을 퍼부으며 화력을 쏟아부은 결과 조선군이 밀리게 된다.
V. 충주성
그러나 그 전투 순간에 왜군 기동부대가 충주성을 점령해버린다. 이 때 탄금대에 있던 신립은 충주성이 떨어졌다는 소식을듣고는 갑자기 지휘는하지 않고 충주성을 구하러 떠나버리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고 만다. 총 사령관이 전투현장을 이탈해버리면서 당황한 조선군은 전열이 흩어지면서 우왕좌왕 하게 된다. 그런데 충주성을 구하러 갔던 신립은 충주성 안에 있던 왜 정예군사에 의해 박살이나고 도망치기에 이른다. 탄금대, 충주성 모두 전열이 흩어져버린 상태에서 조선군은 왜군의 기세에 밀려 달아나기에 이르고, 이에 왜군은 퇴로를 막음으로서 도망치던 조선군은 달천강(남한강에 합류하는 강)쪽으로 몰려버려 모두 강물에 투신하여 거의 대부분 익사하고, 이일(1538~1601)을 포함한 4명의 장졸이 겨우 탈출에 성공한다.
결과
조선은 이 전투에서 대패하고 왜군은 수도 한양까지 파죽지세로 올라갈 수 있게되는 발판이 마련됨에 따라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가 한양 도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몽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