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조선 바다 전투
배경
1592년(선조25년) 8월 14일 조선 한산도 앞바다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1545~1598)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왜 수군을 상대로 승리한 전투인 한산도 대첩은 3달 이전 1592년 5월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동래가 점령당하고 파죽지세로 북진한 왜군은 충청도쪽에서 조선의 명장 신립(1546~1592)이 이끄는 기마부대를 탄금대에서 궤멸시켜버리고 이에 수도 한양까지 경로가 확보되게 되면서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가 북쪽 명나라 경계지역인 의주까지 몽진을 하게되는 사태까지 가버리면서 왜군은 육전에서는 사실상 승전을 거듭하며 육로는 확보하지만 조선 남해안 제해권에 있어서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함대에 의해 일방적으로 패배하게 되면서 고전을 거듭하게 된다. 이에 왜 수군은 조선 남해안에 대한 제해권을 장악하고자 함에 수군 병력을 대폭 증강시키고 육군에 편입되어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1554~1626)를 수군으로 편입시켜 1진 사령관으로 임명시키고, 2진 사령관 구키 요시타카(1542~1600), 3진 사령관 가토 요시아키(1563~1631)로 하여금 수군을 재편성하기에 이른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왜 수군을 넓은 바다로 끌어들이기 전에 여러차례의 전투를 벌이면서 이들의 시선을 끌기에 이른다.
임진왜란
1592년 5월 왜국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1537~1598, 관백재위1585~1592, 태합재위1587~1598)는 수백여척의 함선과 수십만의 병력을 조선으로 보내 침공케끔 한다. 왜1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 1558~1600)의 병력이 부산진, 다대포진, 동래성을 함락시킴으로서 부산지역을 조선침략의 교두보로 삼아 파죽지세로 북진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조선 정부에서도 이들을 막기 위해 방어사와 별감등을 파견시켜 방어하게끔 하지만 화력의 열세(조선은 활이 주력 장거리 무기, 왜는 조총으로서 화력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로 인하여 조선 육군은 매번 연전연패를 거듭하기에 이르고, 심지어 조선의 명장이라고 불리는 신립(1546~1592)의 1만6천 병력이 충주 탄금대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하게 됨에 따라 선조(1552~1608, 재우1567~1608)가 의주로 몽진하게 되어버린다. 이 때 당시 조선 수군은 수사로 불리는 정3품 상계(당상관) 무관 절도사들이 경상도, 전라도에 각각3명, 경기도, 충청도, 평안도에 각각2명, 황해도, 강원도에 각각1명씩 배정되어있었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나서는 경상도 좌,우수사, 전라도 좌, 우수사는 신설된 직급 종2품 삼도수군통제사 직속으로 편제된다.
이순신의 남해안 제해권 장악시도
당시 정3품 상계 전라좌수사 이순신(1545~1598)은 왜 육군이 조선 육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면서 남해안의 제해권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왜 수군이 서해, 남해안을 침범하려고 시도하는것을 조기에 차단하기위해 이들을 옥포(현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 앞바다), 당포(현 경상남도 통영 당포 앞바다), 당항포(현 경상남도 고성군 당항포 앞바다), 율포(현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율포 앞바다)에서 격파하기에 이른다.
조선 수군 지휘관 | 왜 수군 지휘관 | 승패도 | |
옥포 해전(1592. 06. 16) | 이순신(1545~1598) 원균(1540~1597) |
도도 다카토라(1556~1630) 호리노우치 우지요시(1549~1615) |
조선의 승리 |
당포 해전(1592. 07. 10) | 이순신(1545~1598) 원균(1540~1597) |
가메이 고레노리(1557~1612) 도쿠이 미치유키(1557~1594) |
|
당항포 해전(1592. 07. 13) | 이순신(1545~1598) 원균(1540~1597) 이억기(1561~1597) |
모리 무라하루(?~1592) | |
율포 해전(1592. 07. 15) | 이순신(1545~1598) 원균(1540~1597) 이억기(1561~1597) |
도쿠이 미치유키(1557~1592) |
I. 옥포 해전
1592년 5월, 옥포(현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동)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당시 왜 육군은 동래성 점령이후 파죽지세로 북상하면서 남해 앞바다에 피신해있던 경상우수사 원균은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이순신은 회의끝에 출정을 결정하고 여수 본영(전라좌수사 본영)에 집결하고 함선들을 이끌고 원균의 함선과 합류하여 옥포 근처에서 노략질을 가하던 도도 다카토라(1556~1630)의 함선을 발견하고 이순신은 이들을 포위하여 기습공격을 가한 끝에 도도 다카토라의 함선 26척을 격파하는 승전을 거둔다.
II. 당포 해전
옥포에서 도도 다카토라의 함선을 격파한 이순신은 당포 선창에 왜군 전선 21척이 정박해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순신의 역작 거북선을 앞세워 집중공격을 퍼부으면서 이들의 전선 21척을 모두 격침시키고 당시 왜 전선 대장 가메이 고레노리(1557~1612)는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다.
III. 당항포 해전
당포 해전이 끝난 3일 뒤인 1592년 7월 13일, 당포 해전 당시 도주한 왜 전선이 당항포에 정박해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이 경상우수사 원균(1540~1597), 전라우수사 이억기(1561~1597)등과 합세한 51척의 전선으로 왜선 26척을 격파하기에 이른다. 이 전투로 왜 전선 대장 모리 무라하루(?~1592)를 포함한 지휘부 지휘관들이 모두 궤멸되고 수십여명의 왜 수군 병사의 목을 베우는 전공을 세우게 된다.
IV. 율포 해전
당항포에서 연합공격을 퍼부은 조선 수군은 왜 수군 정탐선을 포함한 큰 함선 수척이 율포쪽에서 부산포쪽으로 도망치는 것을 목격하고 즉시 추격하여 율포 해전이 벌어지게 된다. 이미 전선자체에서 비교가 되지 않던 왜 전선은 모두 조선 수군에 의해 격파당하고 왜 전선 대장 도쿠이 미치유키(1557~1592)는 근처 육지로 도망친 뒤 할복하기에 이른다.
한산도 대첩
I. 와키자카 야스하루
위와 같은 이순신의 조선 남해안 제해권 탈취 시도에 왜 수군 1진 사령관 와키자카 야스하루(1554~1626)는 수군 병력을 충분히 늘려 2진 사령관 구키 요시타카(1556~1600), 3진 사령관 가토 요시아키(1563~1631)로 하여금 전투를 준비하게끔 하지만 와키자카는 전투를 준비하는 이들을 두고 단독으로 출전하기에 이르는데 당시 와키자카의 전력 규모는 전선73척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순신은 이러한 와키자카의 단독행위에 첩보를 입수하여 왜 수군을 공격하기 위해 전라우수사 이억기(1561~1597), 경상우수사 원균(1540~1597)등과 합류하여 전투를 준비하게 된다.
II. 견내량, 학익진
견내량(현 경상남도 거제시와 통영시를 잇는 거제대교 아래쪽 해협)은 암초도 많고 수심이 얕은 탓에 기습전을 감행하기에는 큰 선박이 위치할만한 위치가 되지 못하여 이순신은 큰 바다쪽으로 유인하여 왜 수군을 격침할 전술을 계획하는데 총55척의 전선중 5척정도를 유인용으로 삼아 왜 수군 선봉대와 전투를 벌여 패한 뒤 도망가는 척 하면서 유인하는 방법을 써서 이 미끼를 물은 왜 함선들이 넓은 한산도 앞바다쪽으로 오게 된 순간 각 매복 지역에 숨어있던 함선들을 출격시켜 왜 함선들을 에워싸는 학익진 형태를 펼치게 된다. 이에 순식간에 조선 함대 55척에 에워싸인 73척의 와키자카의 함선들은 일제히 포 공격을 받으면서 당황한 왜 수군은 퇴로를 확보하려고 애쓰지만 학익진 형태로 에워싸여있어 퇴로를 만들지 못하고 그자리에서 함선 59척이 침몰 또는 나포되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수천여명의 왜 수군병력이 전사함으로서 조선의 대승으로 전투가 끝나게 된다. 이것이 한산도 대첩이며 임진왜란3대 대첩(한산도 대첩, 진주 대첩, 행주 대첩)중 하나로 불리는 전투이다.
해전 이후
조선 수군의 공세로 인해 사령관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활에 맞아 부상을 당하고 그와 같이 잔존 4백여명의 왜 수군병사들은 근처 섬 한산도로 도망쳤다. 와키자카는 조선 수군의 추격을 피해 2주에 가까운 시간동안 미역등을 섭취하며 뗏목을 만들어 육지쪽으로 탈출하려고 시도하여 겨우겨우 김해쪽으로 돌아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