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사건/조선

용암포 사건

Mintaka5 2025. 4. 6.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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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포 사건, 1903

 

 

배경

1903년(고종39년, 광무6년) 국경지대인 압록강 하류지역인 용암포 일대를 러시아 제국이 불법적으로 무단점령, 그들이 시행하고자하던 벌채사업으로 불법점거한 용암포 일대의 벌채권까지 요구한 사건이다. 당시 대한제국은 1897년 고종(1852~1919, 조선재위1864~1897, 대한제국재위1897~1907)이 아관파천(1896~1897)이후 친러파가 득세하면서 벌어진 정책인 만한전진정책(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하기위해 추진한 정책)으로 점점 조선내 러시아의 힘이 커져가는데 그 정점을 찍은 사건이 용암포 사건이다. 이에 일제와 대영제국이 반발하여 대한제국 정부에 항의를 한다. 

 

발단

I. 아관파천

1895년 일제는 청일전쟁 승리 이후 조선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는데 거기다가 조정엔 김홍집(1842~1896)등의 친일내각이 들어섬에따라 이들에 의해 눌려 압박을받고 있던 상태였는데, 그 결과 일제의 경복궁 습격(1894)과 을미사변(1895)으로 인해 명성황후 민씨(민비, 1851~1895)가 시해되는 사건까지 벌어진다. 이러한 조선의 상황에 러시아 공사 베베르(Carl Waeber, 1841~1910)는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척족세력에 접근해 친러를 하라고 권유한다. 그렇게 조선26대 임금 고종은 점차 일제로부터 위협을 피하기 위해 1896년 세자 척(미래의 순종, 1874~1926, 재위1907~1910)과 함께 아관파천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이에 갑자기 군주가 사라져버린 조선에 일제는 당황해버리고 김홍집의 친일 내각은 급격히 힘을 잃어 명성황후의 척족세력과 친러세력이 요직을 맡게 되면서 친일내각은 실각하기에 이른다. 

 

II. 절영도 조차

러시아 제국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통해 조선 정부에게 절영도(현 부산광역시 영도구)에 석탄 창고를 설치하기 위해 절영도의 토지를 일정 기간 동안 조차해달라고 요구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런 행태에 조선내 러시아에 대한 여론이 급속도로 안좋아지고 이에 반러운동까지 전개하게 된다. 이러한 여론 악화에 반러운동까지 전개되면서 의식했던 러시아 제국은 한발 물러나 절영도 조차를 포기하고 다른쪽 일에서도 한발 빼게된다.  

 

III. 용암포 요구

1년간의 아관파천(1896~1897)으로 러시아 제국은 조선에 상당한 이권을 챙김과 동시에 위의 절영도 조차처럼 여론을 악화시켜 발뺌한 사건등 여러가지 소요를 일으키는데, 1903년(고종39년, 광무6년)엔 압록강 하류 용암포 일대의 삼림벌채권과 러시아 직원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용암포에 자국 병력 100여명을 보내 불법적으로 용암포를 점령해버린다. 이들은 점령한 것으로도 모자라 포대를 설치하고 자국민을 이주시키고 대한제국 정부에 용암포 조차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러시아 제국의 행태에 열강인 대영제국, 미국, 일제는 러시아 제국의 용암포 조차를 불법적 행태로 규정하고 개항을 요구하기에 이르는데 이에 대한제국은 용암포 지역을 개항하는 차원에서 마무리 된다. 러시아 제국은 이로서 물러나게 되지만 이를 주도한 일제에 대한 반감의 칼날이 세워지게 되면서 이듬해인 1904년(고종40년, 광무7년)러일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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