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 1882
배경
1882년(고종18년), 훈련도감의 병사들이 매달 선혜청 관할인 도봉소()에서 지급받는 녹봉인 쌀의 양이 절반으로 줄은 것도 모자라 쌀에 모래와 겨가 섞인채로 지급됨에 따라 병사들이 폭동을 일으킨다. 이들은 이러한 불이익에 지급담당관이 선혜청 소속 민겸호(명성황후 친척오빠이자 고종의 외삼촌, 1838~1882)만 믿고 오히려 적반하장 태도로 나오게 되면서 병사들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를 도봉소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하여 도봉소 사건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이 터지자 선혜청 민겸호는 병사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려 주동자들을 체포하고 포도청에 일임한다. 난에 참여했던 병사들은 체포된 병사들을 위한 탄원서를 작성하지만, 흥인군 이최응(1815~1882)이 고종(1852~1919, 조선재위1864~1897, 대한제국재위1897~1907)에게 이 사건을 빨리 진압할 수 있게끔 주청함에 따라 시급해진 병사들은 자신들의 상관인 이경하(1811~1891)에게 찾아가 탄원서를 보여줌으로서 선처를 호소하는데, 이경하는 민겸호에게 직접가서 이야기하라고 발뺌한다.
당시 정치 상황
임오군란이 터지기 8년전인 1874년(고종10년), 고종의 아버지이자 섭정이였던 흥선대원군 이하응(1821~1898)이 실각하고 섭정직에서 물러난다. 그 이유는 1873년 말, 흥선대원군이 대신들에 의해 탄핵당하여 세력을 잃게 되면서 섭정에서 물러나게 되는데 이미 10년넘게 이어진 쇄국정책으로 인해 조선의 민심역시 보수적이였는데, 1875년(고종11년)에 발생한 운요호 사건으로 인해 이듬해 강화도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갑작스럽게 개화가 되기 시작한다. 갑작스런 개화로 인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지지하던 척화파는 힘을 잃게 되고 개화파와 수구파가 득세하게 된다. 척화파는 어떻게든 정권을 다시 장악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게, 1881년(고종17년) 이재선 추대사건으로 흥선대원군 측근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고종과 명성황후(민비, 1851~1895)를 폐위시키고 고종의 서형인 이재선(1841~1881)을 왕으로 추대하려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이재선을 포함한 주동자 수십명이 사사되거나 처형당하고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처형되지 않았다. 이후로도 이들은 일제의 후원으로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고 초대 책임자를 민겸호(1838~1882)로 하였다.
사건
I. 원흉
초대 별기군 책임자 민겸호는 별기군과 선혜청, 병조판서등을 역임하는 중책을 맡고 있었는데 1882년(고종18년) 훈련도감, 용호, 금위, 어영, 총융을 포함한 5영을 2영(무위영, 장어영)으로 축소하면서 대량 해고와 함께 봉급도 제대로 지급해주지 않는다. 이에 구식군대 병사들은 신식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을 느끼면서 이러한 원인들이 민씨로부터 있다고 생각해(마침 신식군대 별기군 책임자 민겸호도 민씨) 민겸호를 포함한 개화파를 표적으로 삼게 된다.
II. 사건 시작
구식, 신식군대의 봉급을 지급하는 기관인 선혜청의 도봉소는 훈련도감 병사들에게 이미 봉급이 몇개월 밀려있던 상태였는데, 우선적으로 1개월치 봉급만 지급하는데 이 지급된 봉급(쌀)은 썩은 쌀에 모래와 겨까지 섞여있는 상태라 병사들이 더이상 부당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지급담당관이 책임자인 민겸호만 믿고 적반하장으로 나오자 더이상 참지못하고 폭발하게 된다. 이들은 선혜청, 무위영 소속인원들에게 돌을 던지고 매로 때리는등 난리가 난다. 이를 도봉소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하여 도봉소 사건이라고도 불리고 아래 표는 이 사건의 주동자격 인물들 목록이다.
생몰년도 | 생몰년도 | ||
김춘영 | 1844~1885 | 강명준 | 1849~1882 |
유복만 | 1850~1882 | 홍만복 | ?~1882 |
정의길 | ?~1882 |
이러한 소요에 책임자 민겸호는 이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려 체포한 뒤 이들을 포도청으로 이관하여 고문을 받는다. 훈련도감 소속 병사들은 이들을 구명하기위한 탄원서를 작성하여 상관인 이경하(1811~1891)의 집으로 가지만 이경하는 민겸호에게 가라며 발을 빼버리고, 민겸호의 집으로 가지만 민겸호는 출타중이였던 탓에 분노한 이들은 민겸호의 집에 있는 살림살이들을 때려부수고 난 뒤 운현궁(흥선대원군의 저택)으로 가서 흥선대원군을 만나게 된다.
III. 정치로 쓰이다
마침 재기를 노리고 있던 흥선대원군 입장에서는 좋은 미끼가 들어온 셈이라 재집권할 발판을 삼을 수 있는 계기로 삼아 이들에게 우선 밀린 봉급 지급등을 약속하고 대기하게끔 한다. 흥선대원군은 이들을 이용하여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게 하고, 포도청을 파옥시켜 하옥되어있던 척사론자들을 탈출시키고 일제 공사관까지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들을 막기위해 신식군대 별기군까지 투입되지만 이들마저도 제압시켜버리고 별기군 병영까지 쳐들어가서 일제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1848~1882)등을 포함한 일본인까지 살해하는등 규모가 점점 커진다.
흥선대원군은 이 때 명령을 내려 이들을 궐에 쳐들어가게끔 하는데, 마침 궐에서 발각된 민겸호(1838~1882),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이 살해되는등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조정에서는 이들의 상관인 무위대장 이경하를 경질하고 흥선대원군의 장남인 흥친왕 이재면(1845~1912)을 임명케 하여 사태를 진정케끔 한다만, 고종은 이미 이들을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서 흥선대원군이 입궐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흥선대원군은 다시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IV. 청나라와 일제의 개입
그렇게 흥선대원군은 훈련도감 병사들과 약조했던 밀린 봉급 지급을 해주기위해 우선적으로 민씨들을 몰아내고 장남 이재면을 훈련대장겸 호조판서, 선혜청 책임자등을 역임하게끔 한다. 이에 민씨들은 청나라에 머무르고있던 영선사 김윤식(1835~1922), 어윤중(1848~1896)등은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하게 되면서 북양대신 이홍장(1823~1901)이 정여창(1836~1895)제독 으로 하여금 병력500여명을 조선으로의 출동을 명하게 되고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납치를 목표로 입국하게 된다. 그러나 일제역시 이전에 공사가 습격당할 때 일제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1842~1917)가 본국에 이 소식을 알리면서 이들이 보낸 병력 300여명도 동시에 조선에 상륙하면서 조선에 압박이 들어오게 된다.
청군은 흥선대원군이 군영을 방문한 틈을 타 청나라 텐진으로 납치하게 되면서 흥선대원군의 정권은 한달만에 끝나버리게 된다. 그렇게 청군은 구식군대를 습격해 체포, 임오군란을 주도한 11인은 처형당하기에 이른다. 거기다 일제는 지난시일 공사관과 일본인 살해등 자국민의 피해 배상을 요청하면서 조선은 일제와 제물포 조약(조일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되면서 피해보상을 하게 되었고, 일제는 조선에 있는 자국 공사관에 경비병을 두어 경계를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