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진 전투, 1592
배경
임진왜란(1592~1598)이 발발한지 2개월이 지난 1592년 7월, 경상도 의령 출신 의병장 곽재우(1552~1617)을 중심으로 뭉친 50여명의 의병들과 왜6군 선봉 지휘관 안코쿠지 에케이(1539~1600)의 2천병력을 기습해 패퇴시킨 전투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왜군들은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제외하고 모든 지역을 빼앗았었는데 왜군들의 보급 입장에서도 수로를 통한 보급보다 육로를 통한 보급이 더 수월하고 안전했기에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 왜6군을 경상도 의령지역으로 보낸다. 그러나 경상도 의령 출신인 의병장 곽재우는 이를 가만 두고 볼 수 없어 수십명의 의병들을 규합시켜 왜6군 선봉장 안코쿠지 에케이가 이끄는 2천 병력을 기습하기위해 정암진쪽에 매복한다.
임진왜란
I. 발발
1592년(선조25년) 5월,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1537~1598, 관백재위1585~1592, 태합재위1587~1598)가 이끄는 왜군 20만이 부산 앞바다에 상륙한다. 이들은 보름도 안되는 시간동안 부산진과 동래성을 점령해버리고 파죽지세로 북진하는 왜군으로 인해 수도 한양까지 위협받는 상황이 오게되면서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가 명나라 경계지역인 의주로 몽진하기에 이른다. 다행이도 전라좌수사 이순신(1545~1598)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왜 수군을 남해안에서 패퇴시켜 왜 본토로부터의 보급길을 막게 되고 게다가 명나라에서도 조선에 원병을 보내게 되면서 왜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II. 의병장 곽재우
위와 같은 이유로 왜군은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게 되면서 병사들이 굶주리고 병력 보충이 되지 않아 전투에 차질이 생기게 되면서 어려움이 생기는데, 그 어려움 와중에 조선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된다. 때마침 경상도 의령출신 의병장 곽재우(1552~1617)는 의령을 거점으로 창녕, 합천등에서 거병을 일으키는데 붉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갑옷을 입고 의병 활동을 하였다 하여 천강홍의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의병장으로서 용맹함을 겸비하였고 왜군들을 기습공격해 그 용맹성이 왜군에게도 익히 알려진 인물이라, 왜군들 사이에서 곽재우라는 이름만들어도 벌벌 떨고 두려워했다고 한다.
다시 돌아가서, 왜군들은 조선 수군의 활약으로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수로로 통한 보급을 포기하고 육로로통한 보급을 취하기 위해 조선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노리게 된다. 그렇게 왜6군은 선봉장 안코쿠지 에케이(1539~1600)로 하여금 2천여명의 병력을 주어 전라도를 점령케끔 명령한다.
III. 정암진
왜6군 선봉장 안코쿠지 에케이가 2천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전라도를 점령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의병장 곽재우는 이들을 기습하기위한 장소를 물색하는데, 마침 의령쪽에서 전라도로 가려면 진주를 거쳐야 하고, 진주에 도달하려면 남강을 건너야 했기에 곽재우는 이들의 도하로인 경상도 의령 남강 정암진에서 매복하여 안코쿠지 에케이의 선봉군을 기습하고자하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렇게 마침 1592년 7월 3일(음력 5월 24일), 왜6군 선봉장 안코쿠지 에케이가 이끄는 2천여명의 선봉병력이 정암진에 도달하였고 안코쿠지 에케이는 남강을 도하하고자 안전한 지대를 골라 푯말을 부하들로 하여금 세워두게끔 지시한다. 이러한 행동을지켜본 곽재우는 당일 밤에 의병들과 함께 왜군들이 세워놓은 푯말의 위치를 잘 빠지는 늪지대쪽으로 옮겨 세우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안코쿠지 에케이와 왜2천병력은 그대로 도하를 하여 진격하게 되면서 그대로 늪지대에 빠지게 되면서 이 때를 기다린 곽재우를 포함한 의병 수십여명은 즉시 출진해 기습하여 이들을 도륙하기에 이른다.
IV. 정암진 전투 결과
왜군들은 늪지대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매복해있던 곽재우의 의병들에게 기습공격을 받아 아비규환이 된다. 그렇게 2천여명에 달하는 왜6군 선봉대들은 말그대로 전멸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면서 전투에서 패하고 만다. 이러한 패배소식을 들은 왜6군은 전라도 점령계획을 포기하고 조선 의병과 육군은 방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