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 대첩, 1592. 08. 14
배경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3개월이 되던 시점인 1592년 8월(선조25년), 경상도 해안 한산도 근방에서 큰 해전이 일어난다. 이 전투가 벌어지기 전 왜군은 육지로는 우세를 보이지만 조선 수군에게 연패당하며 점점 동쪽으로 밀려나고 있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1537~1598, 관백재위1585~1592, 태합재위1587~1598)가 육군에 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1554~1626)를 수군으로 급파시켜 조선 수군 토벌을 명령한다.
전라좌수사 이순신(1545~1598)은 거제도와 가덕도 인근에서 왜군의 해군증강을 목격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1561~1597), 경상우수사 원균(1540~1597)등과 합세해 총55척의 전력으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73척의 함대와 맡붙기 위해 거제도와 한산도 사이에 있는 해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이순신은 학익진을 펼쳐 왜군 수군 함대 47척을 격침시키고 12척을 나포하는 큰 승리를 거머쥐게 된다.
발발
I. 와키자카 야스하루
육군에 소속되어있던 다이묘 와키자카 야스하루(1554~1626)는 1592년 7월 이광(1541~1607)의 5만 조선군을 용인 전투에서 격퇴하여 조선군을 상당히 과소평가 하게 되었는데, 그무렵 조선 전라좌수사 이순신(1545~1598)이 왜 수군을 현재 사천에서 거제도에 이르는 남해안 일대(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에서 연패시키기에 이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왜 수군에 배속시켜 조선 남해안의 제해권 장악을 꾀하게끔 한다.
그렇게 왜 수군의 병력은 증강되어 제1진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70척, 제2진 구키 요시타카의 40척, 제3진 가토 요시아키(1563~1631)의 함대까지 합쳐서 73척이 전투에 배치되게 된다.
II. 지휘관 배치, 병력
II-1. 지휘관
조선 지휘관 | 왜 지휘관 | |
I | 전라좌수사 이순신, 1545~1598 | 와키자카 야스하루, 1554~1626 |
II | 전라우수사 이억기, 1561~1597 | 와키자카 사효에, ?~1592 |
III | 경상우수사 원균, 1540~1597 | 구키 요시타카, 1542~1600 |
IV | 중위장 권준, 1547~1611 | 가토 요시아키, 1563~1631 |
V | 이순신*, 1553~1611 | 와타나베 시치에몬, ?~1592 |
*무의공 이순신 또는 입부 이순신, 1553~1611
II-2. 병력
조선 병력 | 왜 병력 | |
함선 | 전선 55척(거북선 3척, 판옥선 52척) | 전선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
병사규모 | 수군 1만명, 노꾼 1만명 | 2만여명 |
III. 한산도
왜 수군은 조선 남쪽 해역 제해권을 되찾기 위해 73척의 함대를 끌어와서 공격을 감행해오기에 이른다. 이 모든 정보를 알고있던 전라좌수사 이순신(1545~1598)은 왜 수군을 한산도 해역으로 유인시켜 이곳에서 적을 섬멸할 준비를 한다. 이 때 이순신이 취했던 작전은 '학익진'이다. 한산도대첩의 본무대가 된 견내량은 지형이 좁아 물살이 거세어 큰 배로 백병전을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6척의 함선을 한산도쪽으로 왜 수군을 유인하고, 미리 매복시켜두었던 함선을 학이 날개를 편 것처럼 왜 함선을감싸는 형태로 포위하기에 이른다.
조선 수군은 포위된 왜 수군을 향해 모든 화력을 동원해 왜 함선 47척을 격파시키는데 성공하고 12척을 나포하는 대전과를 올리기에 이른다. 왜 수군 수장 와키자카 야스하루(1554~1626)는 대패하여 겨우남은 14척을 가지고 경상도 김해 지역으로 도주하기에 이른다.
이후에 끼친 영향
한산도 대첩은 임진왜란(1592~1598)의 3대 대첩(한산도대첩, 진주대첩, 행주대첩)중 하나로 여겨지며 왜는 이 패전으로 인해 조선 남해한 제해권 장악에 실패하게 되고 육군과 수군과의 양용작전이 통하지 않게 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 관백재위1585~1592, 태합재위1587~1598)는 수륙방어로 작전을 변경하기에 이른다. 조선 수군3인 이순신, 이억기, 원균은 이 해전이후 품계가 올라 이순신은 정2품 정헌대부를, 이억기와 원균은 종2품 가의대부를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