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의 난
배경
1811년(순조11년)~1812년(순조12년)까지 홍경래(1780~1812)를 중심으로 평안도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난다. 당시 조선 후기 빠른 경제 성장력을 바탕으로 조선 정부에서는 과거급제자 수를 대폭 늘리지만 급제를 하여도 기존의 체제로는 급제한 자들까지 모두 관직에 앉힐 수 없었던 실정이였기에 이들의 불만이 점점 쌓여져 간다. 그중에서도 특히 청나라와의 국경지대로서 교류가 원만하여 상업이 발달했던 평안도에서 특히 불만이 크게 쌓이고 있었는데,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벼슬길까지 막아서는등의 이유가 존재했다.
그중 평안도 출신으로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인 홍경래(1780~1812)는 1798년(정조22년) 과거에 낙방하고 이후 세도정치와 평안도 지역의 차별에 대한 불만을 품고 과거를 포기하고 연구에 몰두함과 동시에 평안도지역의 상인, 광부등을 포함해 기존의 체제에 불만을 가진 이들과 함께 반란을 모의하게 된다.
평안도
1800년, 조선22대 왕 정조(1752~1800, 재위1776~1800)가 갑자기 승하한다. 23대 왕으로 등극한 순조(1790~1834, 재위1800~1834)는 당시 만10세에 불과하여 대왕대비였던 정순왕후 김씨(1745~1805)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정조는 승하하기 전 자신의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있음을 직감하여 1790년대부터 후일 세자(미래의 순조)의 미래를 보좌하고 책임져줄 한 인물을 천거하게 되는데, 그가 안동 김씨 세도가로 유명한 김조순(1765~1832)이다. 김조순은 순조의 정비인 순원왕후(1789~1857)의 아버지로서 외척이였다.
당시 왕권이 약화되어있던 터라 순조를 대신해 김조순이 국정을 운영하게 되는 세도정치 형태가 나타나게 되면서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안동 김씨 가문으로 채워지는 형국이 된다. 이러한 행태에 관리 인사권까지 독점해버리면서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탐관오리들이 행행하게 되면서 백성들을 수탈하고 억울한자가 생겨나는 행태가 나타나버린다.
그중 평안도는 청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외교, 군사 요충지로서 독자적인 자치권을 이루어 발전했던 지방이였는데 변방지역의 한계로 북쪽이라 농사도 잘 안되는등 살기에는 그렇게 좋지 않아서 이전부터 관리들이 가기 꺼려했던 지역이라는 인식이 퍼져서 오랜기간동안 차별이 만연해왔다.
홍경래
평안도 사람 홍경래(1780~1812)는 몰락한 양반 가문출신 자제로 어릴적부터 학문을 연마하여 과거시험도 1798년(정조22년)치르지만 여러차례 낙방을 맞는다. 자신을 포함한 평안도 사람들이 이러한 불평등과 차별을 직접 겪으면서 결국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평안도 본가로 돌아가 학문과 연구에 몰두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평안도의 핵심 gdp생산계층이였던 상인, 광부, 탐관오리로부터 착취당한 백성들등과 교류하면서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뜻을 가지게 된다.
거사 시작
그렇게 거사를 준비하던 도중 1809년(순조9년), 대기근급으로 조선 전체에 흉년이 찾아와 조선 정부에서도 구황책을 통해서 이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지만 역부족이였다. 평안도역시 심각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그럼에도 탐관오리와 부정부패는 만연했던 상태로 백성들은 더욱 고통받게 된다. 그렇게 홍경래는 1811년 12월 다복동(현 평안북도 태천인근)에서 우군칙(1776~1812)과 함께 광산에서 일할 광부들을 모집한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을 모으게 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다복동에 몰려들면서 난을 일으키니 이것이 홍경래의 난이다.
홍경래는 도원수가 되어 조선 서북일대(평안도)를 모두 점령해나간다. 파죽지세로 밀고나간 홍경래의 반군은 송림, 박천, 가산, 정주, 곽산, 선천, 철산, 용천등을 점령하면서 병력이 계속 늘게되어 반군의 규모는 5천여명에 육박하게 된다. 이는 이미 조선의 기존 질서에 불만을 가졌던 인물들도 홍경래의 뜻에 동참하였고 점령하는 고을의 관리들이 홍경래의 반군이 들이닥칠 때 문을 열어서 수령등이 저항못하게 했다는 점에서 그 세가 점점 불게 된 것이다.
최후
조선 정부에서는 종2품 병조참판 정만석(1758~1834)을 토벌군 사령관으로 하여 반란군을 토벌하게끔 하고 순무영을 설치해 사령부를 만든 뒤 홍경래의 반군이 있던 정주로 가게 된다. 그렇게 도착한 정부군은 정주성의 홍경래 반군과 전투를 치르지만 화력에서도 밀리는 형국이라 성문을 굳게 닫고 농성을 하지만, 정부군은 성 아래로 굴을 파고 들어가 화약을 설치해 폭파시켜 틈을 만들어내 정주성으로 들어가서 성을 함락시키기에 이른다.
홍경래는 전투 도중 총탄에 맞아 사망하고 우군칙(1776~1812)등 수하들은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된 다음 참수형에 처해져 사망한다. 나머지 수천에 달하는 반군들은 여성과 10세 이하의 소년을 제외한 2천여명이 전원 처형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