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사건/조선

칠천량 해전

Mintaka5 2025. 3. 11. 12:26
반응형

칠천량 해전, 1597

 

 

 

배경

원균(1540~1597)의 패작. 1597년 7월 15일(선조30년), 칠천량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시마즈 요시히로(1535~1619)가 이끄는 왜 수군에 의해 대패한다. 당시는 1597년 3월에 왜와 명나라간 교섭이 결렬되면서 다시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이를 정유재란(1597~1598)이라 한다.

왜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 관백재위1585~1592, 태합재위1587~1598)가 명나라와의 교섭이 결렬되고 다시 조선 하삼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공격하여 점령하라는 명을 내리는데, 육로를 내어주지 않는 조선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수로로 보급품을 전달하여야 했는데 그러자니 이순신(1545~1598)이 걸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뜻하지 않게 보직해임당하고 한양으로 압송되는데, 그 이유는 정유재란 당시 왜 1군 가토 기요마사(1562~1611)가 다시 하삼도로 쳐들어오게 되자 조선 정부에서 이들이 오는 길목을 방어하라고 이순신에게 육군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하게 되는데, 이순신은 해상을 지켜야 한다는 명목으로 명을 수행하지 않게 되면서 조선 정부에서 이순신을 잡아들이게 된 것이다. 명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받고 옥사에 갇히면서 육군에 배속되어있던 원균이 수군에 배속되며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꿰차게 된다. 

원균은 수군에 배속된 함선 160척을 이끌고 부산에 있는 왜 본진을 공격하기위해 출전하게 되는데, 왜군은 이를 미리 감지하여 이미 초장에 수백명의 병사를 잃고 다시 한산도로 돌아오는데, 왜 수군은 정비하고 있을 조선 수군을 기습하기 위해 칠천량(현재 경남 거제시 하청면)으로 이동하고 15일 밤을 이용해 조선 수군을 기습한다. 당황한 틈에 조선 수군은 무차별적 폭격을 당해 함선들이 불타고 병사들이 물에빠져 죽는등 궤멸적 피해를 입는다. 당시 칠천량 해전에 원균과 전투를 이끌던 전라우수사 이억기(1561~1597)는 전사하고 원균은 육지로 탈출하지만 왜군의 추격을 받고 사망한다. 이 해전에서 승리한 왜군은 조선 남해안 제해권을 장악하게 된다. 

 

 

정유재란

I.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1545~1598)은 왜국과 명나라간의 교섭이 결렬되어 왜국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는 정유재란(1597~1598)이 발발하게 되면서 조선 정부에서 이순신에게 명령을 내리는데, *아래 글과 같다. 이에 평소 이순신을 시기하던 원균의 모함으로 원균이 이 일을 그대로 선조에게 보고하여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는 명령을 거부한 이순신을 잡아들이라고 하고, 이순신은 보직해임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어 와서 국문을 받고 옥사에 갇히게 된다. 

*이는 왜국의 모략까지 겹쳐진 일이였는데, 임진왜란 초기 1592년 당시 1군장수였던 고니시 유키나가(1558~1600)의 부하 요시라(?~1598)가 경상우병사 김응서(1564~1624)에게 고니시와 사이가 더럽게 안좋았던 가토 기요마사(1562~1611)가 바다 건너 조선에 당도할 것이니 수군을 시켜 가토를 사로잡으라는 것을 은밀히 알리면서 이 소식이 조선 정부에 보고되면서 정부에서는 이순신에게 가토를 잡으라는 명을 내리게 되는 것이였다. 이순신은 이미 가토가 조선땅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일이 왜의 모략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일단 출동을 하긴 했는데..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II. 원균

이순신이 한양으로 압송되고 공석이 된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는 육군에 배속되어 있던 원균(1540~1597)이 오르게 된다. 원균은 임명되기 전과 후의 태도가 달랐는데, 되기 전엔 그렇게 왜군을 쓸어버릴 거라고 호언장담 하다가 임명되고 현실의 벽에 부딫혀 육군과 같이 협공을 하지 않으면 출전안할거다라고 하기도 하고 소수의 왜적을 보고도 도망치는 행태등을 보이면서 여러 문제를 일으키면서 이를 보다못한 정2품 도원수* 권율(1537~1599)이 경상도 충무(현재 경남 통영)까지 와서 원균에게 곤장을 때리기도 한다. 

 

III. 칠천량해전

  조선 수군 지휘부(일부) 왜 수군 지휘부(일부)
사령관 원균(1540~1597) 시마즈 요시히로(1535~1619)
I 이억기(1561~1597) 도도 다카토라(1556~1630)
II 최호(1536~1597) 와키자카 야스하루(1554~1626)
III 배설(1551~1599) 가토 요시아키(1563~1631)
IV 김완(1546~1607) 고니시 유키나가(1558~1600)
V 우치적(1560~1628) 소 요시토시(1568~1615)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1597년 7월 4일, 함선 160여척을 이끌고(거의 모든 수군 함대급) 왜 본진이 있던 부산포쪽으로 항해한다. 무모하게 날씨(바람, 파고)를 고려하지 않고 왜 정탐선을 쫓다가 판옥선12척을 잃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가덕도에서 물을 수급하기 위해 하선했을 때 왜군의 기습을 받는데 이 때 가덕도에서 물을 수급하던 400여명의 아군을 버리고 도주하는 지휘관으로서는 말도안되는 옹졸한 행동을 취한다. 

왜 수군은 이러한 원균의 지휘력을 확인하고 조선 수군에 대한 기습을 강행하는 계획을 하게 되는데, 칠천도에 정박시켰던 수군 함대를 야간에 기습공격하여 수많은 함선을 대파시키고 병사들을 바다에 수장시키는 전공을 세우고 원균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아보고 도망치기에 급급한다. 이 때 전라우수사 이억기(1561~1597)가 전사하고 나머지 지휘관급들도 전사하거나 포로(조방장 김완)가 되고 순천부사 우치적()은 원균과 함께 탈출에 성공한다. 

그렇게 조선은 칠천량해전의 패전으로 인해 조선 남해안에 대한 제해권이 왜군에 의해 장악되게 되면서 불리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남겨둔 12척 

칠천량해전때 참여했던 경상우수사 배설(1551~1599)은 조선 수군의 상황이 불리해지는 것을 목격하고 전선12척과 병사100여명을 수습해 현장을 이탈한다. 그렇게 이후 이순신(1545~1598)이 백의종군되어 있던 상태에서 원균 사망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면서 이순신에게 전선12척과 수습했던 100여명의 병사들을 내주게 된다. 이 12척이 당해 하반기에 벌어지는 명량해전에 쓰이는 전선이 된다. 

반응형

'한국사 사건 > 조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산도 대첩  (0) 2025.03.10
홍경래의 난  (0) 2025.03.09
청일전쟁  (0) 2025.03.08
운요호 사건  (0) 2025.02.27
나선정벌  (0) 2025.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