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헌, 1563~1624
재임 기간 | 군주 | |
98대 영의정 | 1614. 02. 27 ~ 1617. 10. 01 | 광해군6년 ~ 광해군9년 |
출생
1563년(명종18년), 조선 한성부 성저십리 청파(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에서 아버지 기응세(1539~1585)와 어머니 선산 임씨(임백령의 딸) 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조선 중기 문신. 성균관 시절부터 동인성향을 보여오다가 1589년(선조22년) 정여립의 난때 위관으로 혹독하게 다루던 정철(1536~1594)에 반감을 가져 이후 정철이 탄핵되어 처벌될 상황에 놓였을 때 동인이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질 때 강경파를 택하게 되어 북인이 된다.
관리
1582년(선조15년) 성균관 유생이 되어 동인 성향으로 생활, 수학하다가 1589년(선조22년) 정여립의 난때 위관으로서 가혹하게 옥사를 벌여 동인들을 처리하던 정철(1536~1594)에게 반감을 가지고 이후 정철이 가혹하게 일처리했다는 것으로 탄핵을 받아 처벌될 위기에 놓이게 되면서 동인 내부에서 정철의 처리문제로 분열된다. 이는 이산해(1539~1609)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 북인(정철 죽여라)과 류성룡(1542~1607)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 남인(정철 살려라)으로 갈라서게 된다. 기자헌은 강경파(북인)와 온건파(남인)중 강경파를 택하여 북인이 된다. 1590년(선조23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정9품 예문관 검열이 된다.
품계 | 직위 | |
1590년(선조23년) | 증광 문과 병과 급제 | |
정9품 | 예문관 검열 | |
1592년(선조25년) | 봉교 정9품 설서 정7품 |
예문관 봉교 겸 설서 |
1593년~1594년 | 정6품 | 병조좌랑 |
이조좌랑 | ||
사간원 정언 | ||
1595년(선조28년) | 정3품 상계(당상관 승진) | 동부승지 |
1595~1596년 | 우부승지 | |
좌승지 | ||
1597년(선조30년) | 종2품 | 호조참판 |
1599년(선조32년) | 강원도 관찰사 | |
1600년(선조33년) | 정3품 상계 | 부제학 |
1601년(선조34년) | 종2품 | 대사헌 |
1602년(선조35년) | 우부빈객 | |
1603년(선조36년) | 정2품 | 예조판서 |
1604년(선조37년) | 정1품 | 우의정 |
1605년(선조38년) | 좌의정 | |
1606년(선조39년) | 판중추부사 | |
1614년(광해군6년) | 영의정 |
영창대군
7년간의 긴 임진왜란(1592~1598)이 끝나고 기자헌은 1604년(선조37년)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된다. 기자헌은 임진왜란 당시엔 정7품의 하급 관리로서 중앙관직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지 않았을 때 임진왜란 전황을 분석하고 대책하는 임무를 맡기도 하고 왜군들에게 피해를 입는 백성들을 위한 방어체계를 강화하여 보호하고자 하는 정책들을 연구하는 임무를 하였다. 1598년 12월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이 재건될 때 국정개혁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그러나 1606년(선조39년) 영창대군(1606~1614)이 태어나면서 이미 세자였던 광해군(1575~1641, 재위1608~1623)의 즉위를 저지하고 영창대군을 옹립시키기위해 유영경(1550~1608)을 포함한 소북파가 계책을 쓰자 기자헌은 광해군을 지지하면서 이들과 대립하고 광해군을 끝까지 지켜 1608년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무사히 즉위하게끔 한다. 그렇게 광해군 즉위후 유영경을 포함한 소북파에 대한 옥사를 끝내고 난 뒤 정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된다.
영창대군은 1613년 계축옥사로 폐서인되어 강화도에 유배된다. 기자헌은 이에 곽재우(1552~1617)와 함께 영창대군의 신구를 청하는 탄원서를 올리는등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묵살되고 1614년 영창대군은 서거한다.
광해군 치세
1614년(광해군6년) 영의정에 오르고 3년이 지난 1617년(광해군9년) 인목대비 폐모론이 일어나게 되면서 기자헌은 이에 부당함을 알리다가 문외송출 당한다. 인목대비(1584~1632)폐모론에 반대했던 기자헌은 당시 폐모론에 찬성했던 이이첨()에 의해서 문외송출 당한 것이다. 이에 홍원에 유배되기에 이르고 이후 함경도 길주로 이배되었다가 유배에 풀려나 강원도 강릉에 들어가 은거생활을 하기에 이른다.
인조반정
1623년(광해군15년), 인조반정이 일어난다. 이는 서인측 인사들(김류, 이귀, 최명길등)이 집권당이였던 대북파와 광해군(1575~1641, 재위1608~1623)을 몰아내고 능양군(인조)을 옹립한 것이다. 서인측 인사들은 2천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에 가서 이미 포섭해둔 훈련도감 군사가 궁의 대문을 열어주면서 반정에 성공하게 된다. 김류(1571~1648)와 이귀(1557~1633)는 이미 인조반정이전 모의할 시기때 기자헌에게 같은 편이 되어달라고 요청했지만 기자헌은 두명의 군주를 모실 수 없고 신하로서 군주를 폐할 수 없다고 하여 거절했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1595~1649, 재위1623~1649)가 즉위하게 되면서 당시 영의정 이원익(1547~1634)의 출사 추천을 받지만 옛 주인(광해군)을 차마 배신할 수 없다고 하여 사양한다. 그런데 이는 인조가 기자헌이 다른 생각을 품고있다는 의심을 가지게 하여 옥사에 가두게 된다.
이괄의 난
인조의 의심이 풀리지 않은 채로 옥사에 갇혀있던 와중에 이괄의 난(1624)이 터진다. 이 난으로 인해 한양이 점령될 위기가 처하게 되면서 인조를 포함한 서인(당시 집권당)에 의해 처음엔 사사를 명 받았지만 능지처참형으로 변경되어 기자헌은 능지처참형에 처해진다. 사실 조사도 끝나지 않은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라 더욱 이야기가 많았다고 한다.
기자헌의 가족들과 일족들 모두 사형에 처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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