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병기, 1869~1949
출생
1869년 조선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에서 아버지 홍익룡과 어머니 한익화 사이에서 2대독자로 태어남.
배경
1919년,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중 한명인 천도교도이자 독립운동가. 독립선언서 낭독후 체포되어 2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러시아 연해주로가서 고려혁명당을 창당하지만 이역시 발각되면서 2년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출소 후 경성에서 칩거하다가 1945년 해방 목격후 4년이 지난 1949년 서울에서 트럭사고로 사망한다.
초년
1887년(고종23년) 무과에 급제하지만 아버지 홍익룡이 서자출신이라는 점에서 무관으로 활동하진 못하고 정확한 이유까진 아니지만 이러한 차별대우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으로 추측하는 동학에 입교를 1892년에 하게 된다.
동학
동학에 입교하면서 선교를 하던 시기에 동학농민운동의 불씨가 되는 사건이 터진다. 1892년(고종28년) 전봉준(1855~1895)이 접주(동학 관리자)로 있던 고부군(현 전북 정읍)에 조병갑(1844~1912)이 군수로 부임해 오는데 조병갑이 농민들에게 과도한 세금에 모자라 재물을 갈취하고 부당함에 대항하는 농민들에게 가차없이 폭행과 형벌을 가하는 행위에도 모자라 저수지를 억지로 짓게 해 물세까지 받게하고 이외에도 수많은 이유도 되지않는 죄목을 씌워 벌금을 받아대는등 차마 글로 쓰기도 뭣같은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이에 전봉준을 필두로 해서 농민들이 뭉쳐 조병갑에게 마지막으로 시정을 요구하지만 조병갑은 이들을 모두 강경진압하고 체포하여 옥에 가두면서 이후 도저히 개선의지가 없는 것에 전봉준은 1894년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봉기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이 동학농민운동(1894)이다. 이들은 관아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 부패한 관리 체포, 불법으로 착취한 세금을 다시 농민들에게 돌려주는 행동을 보인다. 이에 조선 정부에서도 조병갑등의 부패행위를 처벌하고 새로운 군수 박원명()을 내려보낸다.
홍병기는 동학농민운동 당시 손병희(1861~1922)의 휘하에 참여하여 조병갑등의 탐관오리들을 물리치는데 힘을 보태게 된다. 1894년 이후에도 동학 전도사로서 활동하게 되면서 1900년대에 들어 일제의 대한제국 침탈이 가속화됨에 따라 개화와 더불어 동학의 개혁을 추진하는등 구국운동까지 진행하게 된다.
1919년 33인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로 넘어감에 따라 강한 불만을 가지고 항일노선으로 계속 활동해오다가 1918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 재임1913~1921)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조선역시 윌슨의 제창에 따라 이 원칙에 의해 독립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1919년 2월부터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게 되면서 민족대표33인중 천도교 대표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이에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다.
1921년 출소이후 1922년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일제의 감시를 피해 러시아 연해주에서 후원을 받으면서 활동해오다 고려혁명당을 1926년 창당하지만 탄로나면서 다시 체포되면서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다.
이후
1929년 가출옥하고 당시 60세라는 고령으로 1945년 해방이 되고도 조용히 경성에서 칩거하다가 1949년 1월 트럭에 치이는 사고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