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동삼

Mintaka5 2025. 1. 15.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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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삼, 1878~1937

 

 

출생

1878년 조선 경상도 안동군에서 아버지 김계락(1848~1885)과 어머니 평산 신씨(1845~?)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남. 본명은 김긍식.

 

배경

일제강점기(1910~1945)당시 1910~1920년대까지 만주에서 활동한 군인이자 독립운동가이자 독립운동 단체 경학사의 리더로서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이에 더불어 학교 졸업생들을 이끌고 백서농장이라는 병영을 만들어서 유격전까지 준비한다. 

이후 1919년 3월, 민족 대표 39인의 이름으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4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다시 만주로 돌아와서 서로군정서(사령관 지청천, 1888~1957) 참모장이 된다. 1920년 10월 청산리 대첩에서 김좌진(1889~1930), 홍범도(1868~1943)등과 함께 승리를 거두고 이후에는 대한통군부, 대한통의부, 국민대표회의, 대한민국임시정부등에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이어가지만,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평양에서 감옥생활을 하다가 경성으로 이감된 이후 1937년 감옥에서 순국.

 

독립운동시작

어린시절부터 교육과 더불어 민족주의 운동에 관심을 가져 계몽운동을 시작한다. 1907년부터 계몽 운동 당시 미리 한일병합이 될거라는 것을 미리 내다보고 양기탁(1871~1938)등과 함께 해외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계획을 하기 시작하는데, 마침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계획을 구체화시켜서 1911년 만주로 망명한다. 

일제에 무장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하는 사고를 가졌던 김동삼은 만주로 망명가서 고향인 안동에서부터 계몽주의 지식인이자 동지인 이상룡(1858~1932), 유인식(1865~1928)과 망명가서 합류한 동지 윤기섭(1887~1959), 이시영(1869~1953), 이동녕(1869~1940)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이자 교민들의 생활공동체인 경학사와 경학사의 부속기관이자 교육기관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하는데, 특히 신흥강습소는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게 된다. 그렇게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지건설은 경제적 문제와 만주의 혹독한 기후로인한 흉작으로 인해 순탄하지 않았고 경학사가 1913년 부민단으로 대체되게 되면서 김동삼은 1914년 신흥강습소 졸업생 385명을 이끌고 비밀부대 병영인 백서농장을 개척한다. 

 

본격 무장투쟁 전개

1919년 초,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했던 김규식(1881~1950)을 포함한 민족대표단이 일제의 공작에 의해 무시당하지만 어쨌든 기회를얻어 김규식의 주장과 선언이 비밀리에 한민족들에게 알려지면서 만주에까지 소문이 퍼지면서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날 3.1독립만세운동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만주에있던 김동삼을 포함한 독립운동가들도 이를 듣고 1919년 2월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때 참석한 인물로는 김동삼을 비롯해 김좌진(1889~1930), 유동열(1879~1950), 서일(1881~1921), 이상룡(1858~1932)등이 선언서에 서명하게 된다. 이후3월1일 만세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본격적으로 독립 무장투쟁에 착수하게 된다. 비밀리에 운영하던 백서농장을 바탕으로 해 서로군정서를 세워 참모장이되고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함으로서 더욱 많은 독립군을 양성하기위한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그렇게 1920년 10월 말경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국민회군등과 합세해 청산리대첩에서 대승을 거두고 11월, 일제의 보복성 만주출병으로 김동삼은 일제군과 맞서기위해 서로군정서군을 이끌고 전투에서 승리하여 효과적으로 일제군의 전진을 막아낸다. 청산리대첩에 참여했던 부대들이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여 자유시로 이동할 때 김동삼은 가지않고 만주에서 군사정비를 하기위해 가지않았던게 신의 한수가 된 것이 다행이게도 자유시참변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행보 

1920년 청산리대첩 이후 김동삼은 만주에 따로따로 흩어져있던 독립무장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1922년 남만통일회를 주도하여 통군부가 만들어지고 이후 대한통의부로 확대개편하여 김동삼은 총장직을 맡게 된다. 국민대표회의는 김동삼이 의장에 선임되지만 내부의 분열로 인해 김동삼이물러남에 따라 사실상 결렬되면서 새로운 통합을 시도하기위해 유일단운동등을 전개하지만 이마저도 성과없이 흐지부지되고만다.

 

만주참변과 순국

1930년들어 일제는 대륙침략을 본격적으로 준비함에 이듬해 1931년 일제 관동군사령부에서 만주에 침공을 선포하면서 김동삼이 이를 막고자 노력하지만 일제 경찰에 의해 하얼빈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고 만다. 그렇게 평양으로 압송되어 와서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된다. 

이후 1936년경 평양에서 경성으로 이감되지만 1937년 경성 감옥에서 순국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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