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동, 1884~1911
출생
1884년 조선 한성부 남부 명례방 명례방골(서울 명동)에서 태어남. 본명은 강기주.
배경
구한말 대한제국시기, 항일 의병장으로서 일제 헌병 보조원으로 위장귀순하여 포로가된 의병들을 석방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한 인물. 창의원수부 의병대장 이은찬(1878~1909)과 합류하여 항일투쟁을 지속하다 이은찬이 체포, 처형되고는 의병장이 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망명해 독립군이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뜻을 품고 이동하다가 함경도 원산에서 체포되어 이후 총살형으로 순국한다.
활동
강기동은 이미 10대때부터 대한제국군에 입대한 군인이였고 병과는 기병이고 계급은 참교였다. 그러다가 1907년(광무10년)정미7조약(한일신협약)으로 고종(광무제, 1852~1919, 조선재위1864~1897, 대한제국재위1897~1907)이 사실상 일제에 의해 폐위당하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이되면서 강기동 또한 해산된 군대를 뒤로하고 떠나게 된다.
그러다가 1908년, 강기동이 일본어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일제 헌병 보조원으로 발탁되면서 헌병분견소에서 근무하게 되는데, 당시 헌병대 내에는 1907년(광무10년)에 체결된 정미7조약으로 항일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하던 지사들이 이곳에 투옥되게 된다. 강기동은 이에 2명의 의병이 헌병분견소에 체포되어 투옥되면서 이들을 탈출시키고 총, 권총, 검, 탄약수백발을 탈취해 스스로 창의원수부라는 의병부대에 들어가 의병이 된다.
의병
그렇게 1909년 1월 창의원수부로 들어간 강기동은 의병장 이은찬(1878~1909)과 함께 경기도 포천, 양주지방의 험준한 산악을 바탕으로 일제군에 대항한 유격전을 전개해 일제에 적지않은 타격을 입히는 전공을 세운다. 그러나 군량미와 탄약부족, 병력이 감소하는 불안감속에 의병장 이은찬마저 부상을 당해버려 리더가 사실상 이끌수 없게 되는 시점에 동요가 와서 이은찬은 이에 전방위 타격이 아닌 내부 결속을 결단하여 강기동과 군자금확보등을 논의하게 된다.
강기동은 이은찬에게 헌병보조원으로서의 경력에서 나온 아이디어로 우편물을 탈취하는 방식으로 군자금을 모으자고 제안한다. 재무공금은 우편국에서 취급하고 현금과 우편물을 일괄발송한다는 점을 이용해 군자금을 확보하는데 성공하고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1달만에 이은찬의 부장급으로 임명된다.
계승
그렇게 자금까지 확보된 의병들의 사기가 높아짐에따라 수십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쾌거를 입지만 병력이 줄어드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점점 창의원수부를 토벌할 작전을 펼치는 일제에 슬슬 세력이 와해됨에 동시에 의병장 이은찬까지 일제 경찰에 체포되면서 사실상 의병세력은 구심점을 잃어버려 도주하는 의병들이 속출함에 따라 점점 와해되는 분위기에 1909년 6월 이은찬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에 강기동은 이미 의병세력을 다시 잡기위해 최선을 다하고있던도중에 스스로 이은찬의 직위를 계승하고 다시 항일 항전을 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의병장 강기동
그렇게 의병장이된 강기동은 전임 이은찬 의병장때와 똑같이 의병활동을 전개하는데 직접 군자금을 구하고 직접전투는 최대한 피하며 병력손실을 줄이고 전처럼 같이 산악지형을 이용한 유격전을 펼치는 작전을 구사하게 된다. 이에 일제는 강기동을 잡기위해 현상금을 제시하고 토벌군을 보내지만 신출귀몰한 행태에 번번히 실패한다.
그러나 강기동은 이런 유격전으로한 소모전 형태로는 일제군을 절대 못없앤다는 뜻에 해외로 망명해 독립군이 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고자하는 뜻을 품는데, 이에 군자금을 충분히 모을 때까지 계속 활동하기로 한다.
그러나 1911년 초, 만주로 망명하려고 가던길에 함경도 원산에서 일본인이운영하는 요정에서 체포되고, 이미 이전부터 낙인이 찍혀있던터라 2달만에 총살형으로 순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