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가진

Mintaka5 2025. 4. 12. 19:54
반응형

김가진, 1846~1923

김가진,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846년(헌종12년) 조선 한성부 순화방(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에서 아버지 김응균(1801~1875)과 어머니(?~1853)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조선 후기 문신이자 귀족, 독립운동가이자 경술국치 이전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려던 일제에 맞서 싸운 인물이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국권을 일제에게 빼앗기고 조용히 칩거하나 1919년 3월 1일 3.1만세운동이 일어나면서 칩거를 깨고 일제에 대항한다. 3.1운동 이후 10월 10일 김가진은 의친왕 이강(1877~1955)을 모시고 만주로 모셔 독립투쟁을 지속하기위해 작전을 짜고 이동하지만 안동(중화민국 단동)에 대기하고있던 일제군에게 체포되어 실패하게 된다. 김가진은 곧바로 중화민국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김가진의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3대가 독립운동을 한 집안의 거목이다. 

 

관직

어머니가 첩이였던 탓에 서얼이였고 과거응시가 불가능했기에 김가진은 정조(1752~1800, 재위1776~1800)시기때부터 서얼들에게만 허용되었던 규장각 검서관으로 관직을 첫 시작하는데 이 때가 1877년(고종13년)이다. 검서관으로 생활하면서 1883년(고종19년)인천항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오르는데 이듬해 1884년(고종20년) 갑신정변이 벌어지고 이 이후 적서 차별이 철폐되면서 김가진같은 서얼들에게도 과거응시의 길이 열리게 되어 1886년(고종22년) 40세라는 늦은 나이에 정시 문과 병과로 급제해 홍문관 수찬이 된다. 주로 외교쪽 행정직에 종사하였고 주진종사관, 참찬관, 판리대신, 주일공사, 안동대도호부사, 우부승지에 임명되기에 이른다. 

 

갑오경장 이후

1894년(고종30년)조선은 갑오경장을 단행하면서 조선의 속아문을 일제를 본떠 궁내부를 설치하고 6조를 8아문으로 고치면서 의정부 3정승제를 폐지하고, 총리대신1인체제로 변경하는데에 따라 정3품 안동대도호부사를 역임하던 김가진은 1895년(고종31년) 농상공부대신을 지내면서 독립협회 창설을 주도하고 1902년(고종38년, 광무5년)법부대신등을 맡는데,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반대하다가 관찰사로 좌천되고 1907년 규장각 대제학을 끝으로 정계은퇴 한 후 대한협회 회장으로 선임되어 일진회(친일단체)를 막는데 집중한다. 

 

일제강점기

경술국치로 국권이 빼앗긴 이후 일제로부터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받지만(보통 친일파들이 받은 조선귀족직위이지만 김가진은 달랐다)김가진은 조선귀족직을 반납하고 이들과 달리 조용히 칩거하면서 국권회복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고 1919년 3월1일 승하한 고종(1852~1919, 조선재위1864~1897, 대한제국재위1897~1907)황제의 장례식에 맞춰 3.1만세운동이 벌어진 직후 전협(1878~1927)과 최익환(1889~1959)등이 계획한 제2독립만세시위를 총괄할 대동단 결성과 함께 김가진이 총재로 추대되기에 이른다. 김가진은 아들 김의한(1900~1964)과 중화민국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의 망명을 결행하고 의친왕 이강(1877~1955)을 상해로 망명시키기위해 망명을 시키던 도중 중화민국 안동(현재 단동)에서 일제에 의해 발각되고 만다. 그렇게 대동단이 발각되어 해체가된 이후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으로 활동한다. 

 

순국

1923년, 77세의 나이로 중화민국 상해에서 사망한다. 

반응형

'독립운동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병기  (0) 2025.01.27
강기동  (0) 2025.01.17
김상옥  (0) 2025.01.16
김동삼  (0) 2025.01.15
전명운  (0) 2025.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