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 1889~1923
출생
1889년 조선 한성부 건덕방 어의동계(현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군인인 아버지 김귀현(1860~1890)과 어머니 김점순(경주 김씨, 1861~1941)사이에서 4남매중 셋째로 태어남.
배경
일제강점기(1910~1945)시기 종로경찰서 폭탄 의거를 한 독립운동가. 1919년 3.1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한 이후 [혁신단]을 조직, 암살단을 조직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원을 받아 항일 투쟁을 벌이고자하는 계획을 세워 진공작전을 펼치고자하는 뜻을 가지지만 실패한 이후 김원봉(1898~1958)의 의열단에 가입해 종로경찰서에 폭탄의거를 한 후 일제감시망을 피해다니다가 최후엔 3시간동안 총격전을 벌이면서 피하다가 총알이 다 떨어지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뒤 자결로 순국.
초년
구한말 군인이였던 아버지 김기현이 전역 후 가내 대장간을 운영하면서 8세가 된 1897년부터 아버지의 대장간에서 노동을 시작하는데, 당시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인하여 노인에게 한문을 배우고 1905년부터는 신군야학을 다니면서 배움을 이어나가게 된다. 그러나 이 야학도 외국 선교사간의 갈등으로 인해 스스로 동흥야학을 만들어 불우한 환경의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면서 본인도 공부하게 된다.
21세가 되던 해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로 넘어가게 되고 김상옥은 미국으로의 유학을 준비하기 위해 YMCA부설 야간 영어반에 등록하여 공부하면서 일을 병행하여 생계를 유지한다. 이후 서점경영을 하지만 경영난으로 폐업하고 1912년 형 김춘옥과 동생 김춘원과 영덕철물점을 열어서 생계를 유지하게 된다.
활동
형과 동생과함께 철물점에서 단순 물품제작뿐만 아니라 헌병대 기습작전에 참여까지 하면서 반민족행위자 2명을 처단하고 무기를 탈취하는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다. 철물점이 성행하면서 자금이 확보가 되면서 조합법인을 차려 직원들을 일제로부터 보호하고 일본어 사용금지등을 하며 항일에 대한 의지를 점점 보이게 된다. 더욱이 일본 상권에 밀리지 않기 위해 조선인 상인들간의 결속을 다지면서 다양한 사회적 계몽사업을 실시하게 된다.
3.1운동과 활동
1919년 3.1만세운동이 벌어짐에 따라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뒤어들게 되면서 철물점 직원들과 조합내 상인들과 함께 만세 시위해 참가하여 일제 경찰의 만행을 막는데, 당시 동대문 근처에서 일본 경찰에게 쫓기는 여학생이 위협을 당함에 일본도를 뺏어오는데 이 일본도는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있는 상태이다.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됨에 따라 항일의지를 더욱 크게 하기위해 여러 인물들과 함께 혁신단(비밀결사 단체)을 조직하고, 1920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계자들과 협의하여 무기를 확보하고 김원봉(1898~1958)의 의열단에 가입하게 된다.
성명 | 생몰년도 | 비고 | |
혁신단 조직위원 |
박노영 | ? ~ ? | 중앙고보 졸업반 |
윤익중 | 1896 ~ 1963 | ||
신화수 | 1896 ~ ? | 불교학원 졸업반 | |
정설교 | 1894 ~ 1969 | 중앙고보 졸업반 | |
회원 | 서대순 | 1893 ~ 1951 | 수하동보통학교 소사 |
전우진 | 1889 ~ 1939 | 우편배달원 | |
김화룡 | ? ~ ? | ||
지주택 | ? ~ ? |
의거
1922년 말 실탄 수백발과 권총, 폭탄등을 확보하고 항일 문서를 가지고 경성에 잠입한다. 농부로 변장하여 신의주쪽으로 철길을 넘어오면서 국경수비를 서던 경찰을 사살하고 검문원을 때려눕힘으로서 잠입에는 성공하지만 일제에 보고가 올라가게 되면서 경계가 강화되어버림에 따라 거사시기가 늦어지게 된다.
그렇게 때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김상옥은 준비해온 폭탄을 던져 경찰서를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김상옥의 은신처는 매부였던 고봉근의 집이였는데, 고봉근의 집에서 셋방살이를 하던 여성이 종로경찰서에 있는 자신의 친오빠에게 밀고하면서 김상옥의 은신처가 탐지되면서 고봉근의 집이 경찰들에게 포위됨에 따라 김상옥은 권총으로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여 여럿을 사살하고 중상을 입히고 산으로 도주하게 된다. 여기서는 한 절의 스님에게 부탁하여 스님변장을 하고 다음거사를 계획하게 된다.
그러나 혁신단 멤버중 하나인 고우진(1889~1939)가 고문끝에 은신처를 실토함으로 인하여 경찰을 피해 총격전을 벌이며 3시간이나 되는 시간동안 피해다니지만 총알마저 다 떨어져버림에 따라 최후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한발을 자신의 머리에 쏨으로서 순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