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운, 1884~1947
출생
1884년 조선 한성부 종현(현 서울 명동부근)에서 아버지 전성근(1845~1900)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성녀 사이에서 13남매중 7남으로 태어남.
배경
1908년 3월23일, 미국인 더럼 W.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1851~1908)를 장인환(1876~1930)과 저격한 독립운동가. 스티븐스는 1904년 대한제국 외교고문으로 임명되었는데 일제의 추천으로 임명된 친일 성향의 외교고문으로서 일제의 이익을 위해 제국주의 정책을 미화하면서 조선인들의 분노를 사게되는데, 특히 저격당일 미국 수도 워싱턴 D.C에서 "일제의 대한제국 지배는 대한제국에 유익하다"라는 발언으로 격분한 전명운과 장인환에게 저격당한 것.
초년
한양에서 자라며 청소년기 나이 14세때인 1898년(광무1년)에 열린 만민공동회 집회와 독립협회등의 활동을 목격하면서 자기 자신도 국가적 계몽사업에 일조하고자 마음을 먹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신학문에 관심이 있어 익혀 학교를 졸업한 후 1902년부터 미국 노동이민이 붐을 이루면서 유학까지 하고싶다는 마음에 미국행을 선택한다.
미국
그렇게 1903년(광무6년)배를 타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사탕수수농장에서 노동을 하지만 고된노동에 열악한 환경, 값싼임금등으로 한계를 느낀 전명운은 더 환경이 나은 미국 본토로가기로 마음먹고 이듬해 1904년 샌프란시스코에 이주하게 된다. 이미 샌프란시스코에 와있던 안창호(1878~1938)등의 이주 조선인들은 친목회를 결성하여 이민오는 조선인들을 안정적으로 정착시켜주기 위해 일자리 주선과 숙소를 제공해주고 있었는데 전명운도 이러한 친목회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생계를 위한 노동과 친목회 활동을 병행하면서 역시 이주하는 조선인들을 지원한다.
안창호는 1905년 이주 조선인 규모가 커짐에 따라 친목회에서 협회(공립협회)로 규모를 키워 당시 대한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제의 만행을 타도하고 민족성을 일깨우기 위해 항일운동의 목적까지 병행하며 활동한다. 그해 말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제에 넘어가고 1907년엔 한일신협약(정미조약)이 체결됨에 일제의 수탈이 가속화됨에 따라 미국의 공립협회에서도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운동이 활발해진다.
전명운은 샌프란시스코에 수년간 머무르면서 생계와 유학에 필요한 학비를 마련하고자 노동을 하지만 그마저도 녹녹치 않은 임금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는데, 당시 미국 알래스카에서 본토보다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알래스카로 가서 어업활동을 하면서 노동을 주선해주는 일을 맡게 된다.
스티븐스
1908년 알래스카에서 노동을 하며 주선을 하던 전명운은 일제가 사실상 임명한 대한제국 외교고문 친일파 더럼 W. 스티븐스(1851~1908)가 미국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스티븐스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되게끔 일제에 도움을 준 장본인이자 일제의 대한제국 지배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하는 인물로서 조선인들에게 상당한 반감이 있던 인물이였다.
심지어는 1908년 3월 21일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신문 인터뷰에서 일제가 대한제국을 보호한 이래로 대한제국에 유익한 일들이 많이 일어남에 따라 조선인들도 일제를 환영하고 있다는 망언을 내뱉는다.
이 기사를 본 전명운은 극도로 분노하며 공립협회 내에서도 이에 대한 항의목적의 대표단을 꾸린다. 4인의 대표(최정익, 정재관, 문양목, 이학현)들이 스티븐스가 있는 호텔(페어몬트호텔)에 파견하여 항의와 더불어 기사정정과 해명을 요구하지만 스티븐스는 거부하면서 더욱 망언을 들어놓는다.
이에 격분한 4인은 다시 협회로 돌아와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가 공립협회 소속 전명운이 자신이 스티븐스를 죽이겠다고 자원한다.
스티븐스 저격
1908년 3월 23일, 스티븐스가 수도 워싱턴D.C로 가기위해 샌프란시스코 항구로 가던 도중 전명운은 가지고있던 권총을 발사하지만 불발하여 권총을 들고 스티븐스와 격투를 벌이며 권총으로 얼굴을 가격하고 있던 때, 이를 지켜보던 장인환(1876~1930)이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스티븐스에게 총을 3발 쏜다.
그렇게 쓰러진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옮겨지고 장인환과 전명운은 그자리에서 미국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연행된다. 전명운은 스티븐스와의 격투로 부상을 입어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완쾌된 후 재판을 받게 된다. 둘은 공범관계가 아님으로 전명운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지만 장인환은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수감된다.
교민들은 성금을 모아 변호사를 선임하고 통역을 이승만(1875~1965, 재임1948~1960)에게 요청하지만 기독교인이라 살인범의 변호를 통역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당시 미국 유학중이던 학생 신흥우(1883~1959)가 맡게 된다.
말년
전명운은 풀려난 이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주했다가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서 개명후 생계를 꾸려나가지만 생활고로인해 1947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