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홍범도

Mintaka5 2025. 1. 13. 14:07
반응형

홍범도, 1868~1943

홍범도,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868년 조선 평안도 양덕에서 아버지 홍윤식(1833~1877)과 어머니(이름미상, 1835~1868)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일제강점기(1910~1945)당시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등에서 대승을 거둔 독립운동가. 1895년(고종31년)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민비, 1851~1895)가 시해당하는 사건을 계기로 일제가 '총포기화류 일제 단속법'을 발령하면서 이에 반발해 의병을 일으킨다. 이후 1907년 정미7적(이완용, 송병준, 이병무, 고영희, 조중응, 이재곤, 임선준)등이 한일신협약에 찬성하고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과 함께 화기를 수거하려는 법을 통과시키려고 할때 다시 항일 의병을 일으키지만 이후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 넘어가게 되면서 만주로 넘어가서 독립군 양성을 하면서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려 한다.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세력을 모으면서 1919년 3월1일 3.1운동이 전개됨을 계기로하여 운동 세력들이 만주, 연해주쪽으로 넘어옴과 동시에 일제가 만주, 연해주까지 접근하면서 이들의 야욕을 막기위해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등을 대승으로 마무리짓고 이후에도 활동을 전개하지만 이후 러시아 공산당의 배신으로 독립군이 사살, 포로가 되는 자유시참변을 겪고 별다른 활동을 못하다가 1937년 스탈린(1878~1953)에 의해 강제로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이주되면서 생계를 이어가다가 1943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사망. 2021년 8월 15일 광복절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들어오게 됨으로써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된다. 

 

초년

10대가 되기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사망해버리면서 고아가 되어버려 머슴살이를 하면서 생계를 책임지고 이후 1883년(고종19년)평양 감영 소속 나팔수로 복무를 시작하지만 구타와 괴롭힘등으로 4년만에 탈영을 하고 공장에 취직하지만 여기서도 임금이 체불되고 공장주와 말다툼을 하다가 살해후 도주하는등 파란만장한 어린시절을 보낸다. 

이후 1895년(고종31년) 고종(1852~1919, 조선재위1864~1897, 대한제국재위1897~1907)의 정비인 명성황후 민씨(1851~1895)가 시해당하는 사건인 을미사변으로 인해 을미의병이 일어나던 찰나에 홍범도는 강원도에서 김수협과 의병을 일으켜 일제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의병부대를 조직하지만 일제군에 의해 세력이 꺾이면서 감시대상이 되자 은신을 하고 이후 농업을 병행하며 의병당시 포수들을 모아 포병대장으로서 노력한다. 

 

나라가 뺏기기 전

1907년(광무10년)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화기를 회수하려고 할 때 부대를 이끌고 일제군을 습격하여 수십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수비대까지 격파하는 전과를 올린다. 그렇게 홍범도의 의병규모는 수백여명에 달할 정도로 커지지만 당시 국운이 기울고 있던 상태였다. 가족들이 죽어감에도 홍범도의 항일 의지는 꺾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항일의병을 전개함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신식 무기의 화력에 밀려 나아질 상황이 되지 못했고 1909년 9월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이라는 전라도 고립작전에 사실상 의병이 무력화되면서 홍범도는 북쪽에서 역량을 키우는데 집중한다. 1910년 8월 29일 결국 경술국치로 인해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로 넘어감에 따라 홍범도는 만주로 망명을 가서 독립군양성에 힘을 쏟게 된다.

 

만주, 연해주에서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만주 길림성으로 와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1911년 러시아 제국 연해주로 와서 그곳의 민족주의자들과 규합하여 '권업회'를 창립하여 연해주지역 한인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항일투쟁을 가하는 두가지의 전술로 최종적으로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기위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홍범도는 이후 연해주지역에서 막노동을 통해 군자금을 계속해서 모금하고 무기를 비축하는등 목표를 향해 한발자국씩 나아가는 시기를 거치게 된다.

 

봉오동 전투

1919년 3.1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독립운동을 한창 준비중이던 홍범도에게 좋은 기회가 오게 된다. 이전까지의 수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서 3.1운동으로 쫓기는 조선인들이 간도로 오고있다는 정보에 그곳으로가서 독립군 병사들을 모집하여 부대를 꾸려 국내로 들어가서 일제를 몰아내는 진공작전을 기획하게 된다. 

물론 대항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병력과 화기들이였지만 다른 독립군 세력과 규합하여 진공작전을 하게되면서 일제군과 수비부대등을 기습한다. 여러번의 기습으로 참패를 당한 일제는 이들을 토벌하기위한 토벌군 250여명을 편성해 1920년 6월 7일 봉오동으로 오게 된다. 

홍범도는 이 정보를 미리 파악하고 험악한 골짜기지형인 봉오동에서 전투태세를 갖추고 이들을 맞는데, 이들을 골짜기로 유인하여 격파하면서 250명의 토벌군중 절반이 사살되고 독립군은 4명이 전사하는데 그쳐 대승을 거둔다.

 

청산리 대첩

1920년 10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김좌진(1889~1930)의 북로군정서, 최진동(1883~1941)의 군무도독부, 신민단, 안무(1883~1924)의 국민회군등의 독립군이 규합해 청산리 지역에 3천여명이의 병력이 집결한다. 전투가 벌어지기전까지 전투를 해야하느냐 피해야하느냐등 여러 의견들이 엇갈렸지만 최종적으로는 일제군이 몰려옴에 따라 북로군정서의 김좌진과 이범석등이 매복작전에 들어가면서 사실상 전투가 시작된다.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급습을 당하지만 역으로 일제군 수백명을 사살하고 이후 일제군이 자기들 병력을 독립군으로 착각해 오인사격하면서 피해가 늘어감에 따라 연합부대가 협공하여 1200여명을 사살하고 3천여명이 부상당하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자유시참변(흑하사변)

전투 이후 대패를 당한 일제는 이들을 완전히 소탕하기위해 대규모의 토벌작전을 펼치게 되는데, 이들이 아무리 사기가 드높다해도 위협은 항상 존재했기에 연해주쪽으로 가게 된다. 이는 연해주에 있던 국민의회가 제시한 방법으로 이미 러시아측과 접촉을 하여 1921년 러시아 자유시에서 독립군들을 집결시키게끔 된다. 그러나 이들이 모이면서 사정이 다 다른 각 부대별로 엇갈린 의견차이로 분쟁이 초래되면서 내부에서 암투가 벌어지는데 내부에서 주도권이 고려공산군으로 넘어가게 된다. 홍범도는 어떤 군이 주도권을 잡든 오직 독립운동만을 생각했기에 이해관계는 크게 없었다고 한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볼셰비키 혁명(1917)이후 쇠약해진 국력으로 일제와 부딫힐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 측에서는 독립군과의 무장협력을 취소하고 무장해제를 통보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반대하던 독립군들에 대해 러시아군이 강제로 해산을 강행함에 따라 공격을 해버리고, 수백명의 독립군들이 사망하고 남은 인원들은 겨우 러시아를 탈출한다. 

 

이후

홍범도는 이후 1922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공산당 국제대회에 극동지역의 식민지, 반식민지 혁명가로서 참석하고 1927년에 볼셰비키당에 입당하는등의 소규모 행보를 보인다.

 

말년

1937년 소련 서기장 스탈린(1878~1953)에 의해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강제이주 당한다. 당시에 일본인과 닮았다는 것으로서 황당한 이유였지만 소련측면에서 악화된 일제간의 관계와 일제 간첩을 차단한다는 목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행태를 보인다.

홍범도는 카자흐스탄 지역 키질로르다에서 농장일, 극장관리인등의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다가 1943년 고국에 돌아가지못하고 키질로르다에서 사망하고 그곳의 공동묘지에 묻힌다. 

홍범도 사후78년후인 2021년 8월 15일 광복절, 홍범도의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봉환되면서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게 된다.

반응형

'독립운동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동삼  (0) 2025.01.15
전명운  (0) 2025.01.14
이재명(독립운동가)  (0) 2025.01.08
김좌진  (0) 2025.01.07
윤봉길  (0) 2025.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