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 1889~1930
출생
1889년 조선 충청도 홍주목(현 충남 홍성군)에서 아버지 김형규(1864~1892)와 어머니 이상희(1863~1949)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독립군 대장으로서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자 영웅. 어릴적부터 글공부보단 병정놀이를 즐겨했고 강한성격을 가졌지만 약한자들을 돕겠다는 마음이 자리잡혀있었다. 1905년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면서 계몽적 사고에 입각한 형태로 개화를 하겠다는 뜻을 비추어 1907년 집의 가산을 정리하고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한다.
홍주목에 머물면서 1909년 기호흥학회 홍주 지회에 가입해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고 오성학교를 설립해 교감으로 부임하여 청년들의 교육까지 담당한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독립군 사관학교를 세우기 위해 자금을 모금하러 다니다가 발각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출소하고 1917년 대한광복단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이듬해 1918년 만주로 가서 무오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919년엔 북로군정서 사단장이 되고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일제군을 대패시키는 전공을 세운다.
이후에도 신민부, 성동사관학교, 한족총연합회 주석등을 역임하여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나가지만 1930년 1월 24일 고려공산당 소속의 박상실에게 권총으로 암살당하고 만다.
초년
어릴적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가정환경덕분에 부족함없이 자랄 수 있었지만 1892년 아버지 김형규가 사망하고 친형까지 한양으로 떠난 후 실질적인 가장역할을 하면서 글공부보단 활동적인 칼싸움, 활쏘기등 병정놀이를 즐겼는데 이때 대장역할을 맡을정도로 강한 성격을 가졌지만 한편으로 '억강부약'으로 약한자들은 돕고 강한자들은 누른다라는 뜻을 새기며 무예를 연마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이후 16세가 되던 해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고 군 장교로서의 교육을 받게 되고 이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나서는 1907년 자신의 가산을 정리하고 노비들을 해산시키고 호명학교를 세워 신교육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개화와 신학문에 대한 교육을 목적으로 당시 김좌진의 고향 홍주목(충남 홍성)에 유지들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으면서 학생들을 양성하고 1909년 기초흥학회 홍주 지회에 가입하여 학문증진과 민중계몽이라는 일념하에 교육사업에 다시 투신한다.
경술국치 이후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 완전히 넘어감에 따라 식민지가 된 후 김좌진은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고자 상점으로 위장한 독립운동 거점을 두고 자금모집을 행하는데, 모금운동을 하다가 발각되어 체포됨에 따라 2년형을 받고 1913년까지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한다.
1913년 출소 후 1917년 비밀결사단체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는데 본격적인 활동은 1915년부터 기록에 나타난다. 1918년엔 만주로 망명을 가서 의병을 일으키는데, 이 때 대한광복군 부사령관을 맡게되고 이후엔 독립군 사단장이 된다.
청산리 대첩
1919년 3월 1일 3.1운동을 계기로 만주 독립군 부대의 혈기는 더욱 높아지는데, 김좌진은 북로군정서를 조직과 동시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해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앞서게 된다.
아래 표는 북로군정서 초기 조직멤버.
생몰년도 | 직위 | |
김좌진 | 1889 ~ 1930 | 육군무관학교 출신, 사령관 |
이장녕 | 1881 ~ 1932 | 육군무관학교 출신, 참모장 |
김규식 | 1881 ~ 1950 | 상해 임시정부 외무총, 대대장 |
최해 | 1895 ~ 1948 | 여단장 |
정훈(가마 이사오) | ? ~ ? | 일제 육군 중위 임관, 친일 |
이범석 | 1900 ~ 1972 | 연성대장 |
일제는 1920년 10월 혼춘사건()을 조작하여 이 구실로 수만의 대병력을 간도에 파견하게 되는데, 북로군정서도 서로군정서와 합류해 백두산 일대에 확장기지를 두겠다는 목적을 두고 이동을 시작했는데, 대병력을 지닌 일제군과의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면서 동태를 파악하는데, 어쨌든 저쨌든 일제의 감시망을 계속해서 피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군정서 내에서도 있던 전투반대파를 앞지르고 일제군과의 일전을 감행하는 쪽으로 방향이 결정된다.
10월 21일 청산리계곡에 매복해있던 부대원들은 일제군을 기다렸다가 일제히 사격을 가하면서 일제 선봉대를 전멸시키고 뒤에 따라오던 본대와의 전투에서도 유리한 고점을 차지함에 따라 대승을 거둔다. 때마침 김좌진 부대가 철수하고 있던 시각에 홍범도(1868~1943)가이끄는 부대가 일제군의 공격을 받아 포위된 상황에서 빠져나와 두 부대가 합세해 일제군을 협공하여 대파하게 된다.
5일간의 전투로 일제군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명이 전사하고 3000여명이 부상당하는 전과를 올린다.
신민부
1925년 항일 독립운동단체인 신민부를 창건하여 북만주지역을 거점으로 두고 이전과 다를 것 없는 무장 독립운동활동을 벌인다. 그와 동시에 소학교를 설치해 독립사상을 주입하고 교육에 집중시켜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키게끔 노력한다. 그러나 신민부는 3년뒤 1928년 해체되면서 흩어짐에 따라 김좌진은 1929년 한족총연합회로 개편하여 활동한다.
암살
1929년 신민부를 개편해 한족총연합회의 회론이 공산주의자들을 배척하겠다는 것 이였는데, 이 때 만주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항일민족주의 성향의 세력이 약화되고 있었을 때라 이를 경계하는 차원에서 단행한 회론이였다. 이미 김좌진은 1921년 만주에서 벌어진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반공주의로 전향했었다.
공산주의 세력에서도 이러한 김좌진이 눈엣가시같은 존재였는데, 이에 박상실이라는 고려공산당 소속 인물에게 1930년 1월 24일 권총으로 암살당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