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급 귀족 & 관리/고려

최영

Mintaka5 2024. 12. 5.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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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1316~1388

 

 

출생

1316년(충숙왕3년) 고려 교주도(현재 강원도 서부) 철원에서 아버지 최원직(?~1333)과 어머니 봉산 지씨 사이에서 1남1녀중 첫째로 태어남.

 

배경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아버지 최원직의 유언에 따라 이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우직하고 고지식하다못해 고집스러운 성격에 청렴함까지 더해져 고려 말기 난세의 고려를 지키는 우국충정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수 많은전투에서 공을 세워 우왕(1365~1389, 재위1374~1388)의 총애를 받아 권신 이인임(1312~1388)의 장기집권에 불만이 있던터에 우왕은 최영을 통해 이들 3인방(이인임, 임견미, 염흥방)들을 몰아내고 우왕이 친정을 함에 따라 더욱 최영을 신임하여 최영의 서녀를 왕비로 맞아들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1388년 이성계(1335~1408, 재위1392~1398), 조민수(1324~1391)등을 요동정벌에 내보냈다가 도리어 위화도회군으로 이들이 명령체계를 어기고 칼날이 돌아오게 되면서 회군소식을 들은 최영은 이들을 막아보고자 하지만 준비시간이 너무 짧았고 5만의 군대를 이겨내기엔 역부족이였다. 그렇게 붙잡힌 최영은 유배되고 우왕이 폐위되고 창왕(1380~1389, 재위1388~1389)이 즉위한 후 1388년 말 처형당한다. 

 

관리

당시로서 늦은 나이인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무반으로 관직에 진출하게 된다. 풍채가 늠름하고 기골이 장대했다고 하며 병서, 무술등을 스스로 익혀 무인의 길을 걷게 된다. 그렇게 중앙정계로 진출해서 양광도 도순문사의휘하에 있게 된다. 1352년부터 최영의 기록이 나오게 된다. 

 

홍건적

한창 원 간섭기때의 고려인지라 원나라의 영향력이 엄청났는데, 1354년(공민왕3년) 홍건적이 등장해 원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게되면서 원 조정에서는 고려에 토벌군을 요청하게되면서 최영이 토벌군 대장군으로서 2천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정하여 이들을 소탕하는 임무를 맞게되는데, 1356년(공민왕5년) 공민왕(1330~1374, 재위1351~1374)이 반원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함에 따라 최영역시 이에 즉시 투입되어 압록강 서쪽 영토를 공격해 회복하고 1350년대부터 들끓기 시작하던 왜적을 격퇴하는데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1359년 서쪽 국경을 수비하던 서북면병마사로 재직하고 있던 중 4만에 달하는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하는데, 이것이 홍건적의 1차침입이다. 의주를 포함해 서북면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함락시켜오다가 2만의 피해를 입히고 다시 돌아간다. 이 때는 홍건적을 서경에서 섬멸시키면서 잘 막아내지만 홍건적의 2차 침입인 1361년엔 상황이 달랐다. 

2차 침입때는 1차 침입때와는 비교가 안되는 규모인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는데 파죽지세로 침입해오는 홍건적을 막기엔 역부족이였는지 1달정도만에 수도 개경근방에까지 이들이 쳐들어오게 되면서 공민왕은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공민왕이 개경을떠나고 1주일이 채안되어서 개경이 함락당해버리는데 공민왕은 복주(경북 안동)에 도달해 군을 정비해 반격을 가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내 각 지역에서 20만의 군대가 모아진 고려군은 홍건적을 격퇴하는데 절반에 가까운 홍건적이 전사하는 기록이 남에 따라 다시 도망친다. 이렇게 2차 홍건적의 난은 고려의 승리로 마무리되게 된다.

  

기황후

그러나 공민왕의 반원정책에다가 친오빠 기철(?~1356)이 공민왕에 의해 암살된거에 이미 고려에 대해 이를 갈던 고려출신 기황후(기철의 여동생이자 원 혜종의 황후, 1315~1369)가 공민왕을 몰아내고 충선왕(1275~1325, 재위1298, 1308~1313)의 서자인 덕흥군 왕혜(?~?)를 고려의 왕으로 세우고자 고려출신 반역자 최유(?~1364)로 하여금 군사1만을 내어 1364년 고려로 쳐들어가게끔 한다. 물론 결과는 최영에게 격퇴당하고 최유역시 이 침입때 사망한다.

 

왜구

1358년부터 최영은 왜적 체복사가 되면서 고려 전역에 있는 왜구를 소탕하는데 힘쓰는데, 1365년 창릉(경기도 고양시)에 침입한 왜구가고려 세조(왕건의 아버지 왕륭, ?~897)의 어진을 훔쳐가는 사건이 벌어짐에 따라 이를 빌미로 당시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개혁을 진행중이던 신돈(?~1371)에 의해 좌천되지만 1371년 신돈이 처형됨에 따라 실각한 이후 정승인 정2품 문하찬성사에 오르게 된다. 

 

우왕 시절

I. 목호의 난

1374년(공민왕23년) 탐라(제주도)에서 말을 기르던 원나라 출신 목자 목호들이 주동해 반란을 일으킨다. 공민왕의 반원정책 시행이후 더욱 사이가 나빠진 두 국가사이 때문에 목호들이 고려의 관리를 살해하거나 불리할 땐 원나라 정부에 요청하는 일이 생겨나게 되면서 고려와 수교를 시작한 명나라 정부에서 제주도에서 자란 말 2천필을 바쳐 주원장(1328~1398, 재위1368~1398)의 북원침공에 보탬이 되어야 할 것이다 라는 것에 반발한 목호들이 말을 20%도 채 되지 않는 350필만 내어주게 되면서 고려 정부에서도 탐라(제주도)를 정벌할 것을 결정해 정2품 문하찬성사 최영을 양광전라경상도통사로 임명해 토벌하게끔 한다.

 

II. 조반 사건

1387년 권신 이인임을 포함한 3인방(이인임, 임견미, 염흥방)중 염흥방(?~1388)의 종인 이광(?~1387)이 조반(1341~1401)의 땅을 강제로 빼앗는 일이 벌어짐에 조반이 이광을 그자리에서 죽이는 사건이 벌어져 조반은 이 사건을 조당에 이야기하는데 염흥방은 조반이 난을 일으키려한다고 우왕에게 허위로 보고하는 바람에 조반이 체포된다. 염흥방은 아예그냥 반역으로 몰기위해 조반을 고신해 몰려고 하지만 우왕은 결코 이런 전횡을 볼 수 없다는 판단에 최영과 이성계(1335~1408, 재위1392~1398)를 통해 염흥방, 임견미등을 체포하게끔 한다. 

이 이후 최영은 공로를 인정받아 종1품 문하시중에 오르고 이성계역시 종1품 수문하시중에 오른다.   

 

III. 요동정벌과 위화도회군

1388년 고려는 명나라와 관계가 좋지 않던 상태에서 최영이 우왕에게 요동을 정벌하자고 주장한다. 사실 당시 고려로서는 남쪽엔 왜구가 계속 출몰하고 동북쪽의 여진족과 서북쪽엔 명나라가 떡하니 버티고있는데 정벌시 전선이불리한 상황이 될텐데 왜 정벌을 주장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최영은 우왕의 재가를 받아 본인은 팔도 도통사가 되고 이성계를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5만의 병력으로 출정하게끔 한다.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반대하면서 사불가론(4가지 반대이유, 태조 이성계 게시물 참조)을 드는데, 그럼에도 요동정벌이 단행됨에 따라 출정하지만, 위화도에 다달았을 때 쯤 장마로인해 불어난 압록강물과 장마로 인한 전염병 창궐로 인해 정벌이 불가할 것에 따라 조당에 계속 서신을 보내지만 계속해서 무시하던 조정에 대해 이성계는 조민수와 협의해 위화도에서 회군을 결정하게 된다. 

그렇게 5만의 군대가 다시 수도 개경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에 최영은 군사를 정비해 방비하고자했지만 수하중 이성계편에 돌아선 인물에게 붙잡혀 투옥되고 만다. 

 

사망

그렇게 붙잡혀 투옥되고 경기도 창릉(경기도 고양시)에 유배되었다가 이후 다시 소환되어 국문을 받고 처형명령이 떨어짐에 따라 1388년 처형된다. 당시7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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