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 942~998
출생
942년 출생지 미상, 아버지 종1품 내의령 서필(901~965)과 어머니 평양 황씨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서희의 외교담판으로 유명한 한국사 단골 등장인물. 993년 제1차 고려-거란 전쟁으로 요나라(거란) 동경유수 소항덕(소손녕, ?~996)이 대군(수치의견분분)을 이끌고 압록강 유역으로 쳐들어온다. 당시 고려 군주 성종(961~997, 재위981~997)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선까지 나아가지만 첫 전투(봉산군 전투)에서 선봉장(윤서안)이 사로잡히고 예봉이 꺾이게 되면서 성종은 서경(현재의 평양)에 머물게된다.
대군의 위용에 고려 대신들 사이에서 항복을 하느냐, 할지를 하느냐(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국경을 새로이 설정하느냐?)등의 의견이 나오는데 할지론 쪽으로 의견이 굳어질 때 내사시 서희와 민관(호구, 재정담당) 이지백(?~?)등이 나서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이런 주장을 하냐고 반대하고 성종에게 주장한다.
초기
960년 18세의 나이로 갑과로 과거에 급제한 뒤 관직에 나아간다. 972년 송나라로 보내지는 사신단의 정사로 임명되어 송나라에 가서 서희의 됨됨이와 법도에 맞는 행동등을 높게 평가한 송 태조(조광윤, 927~976, 재위960~976)가 검교 병부상서(현 국방부장관)에 임명했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검교는 명예직.
경종(955~981, 재위975~981)대에 기록은 여러차례의 전쟁으로 인해 소실되어 없어졌기에 이 때 서희가 무엇을 했는지 기록이 거의 없다. 경종 사후 성종(961~997, 재위981~997)대에 다시 기록이 나타나 현재까지 이어지는 업적들이 등장한다.
1차 고려-거란전쟁
I. 전쟁배경
980년경 송 태조가 대륙을 통일하자마자 요나라를 침공하는데 당시 혼란스러운 요나라(승천황태후의 섭정)를 치지만, 송이 패배하게되면서부터 조짐이 시작되는데, 요나라 입장에서는 이후 송나라가 고려를 끌여들여 협공을 벌일까봐 불안해하게 된다.
그런 차원에서더라도 요나라는 고려를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고려를 침공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동경유수 소항덕이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 하류일대를 점령해버린다. 이전에 여진족이 고려 정부에 요나라가 침공할 것이라는 정보를 알렸지만 고려 정부에서 오판해버려 버린 것.
그렇게 준비가 제대로 되지 못한 고려는 소항덕이 침공해왔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군사를 끌어모아 전쟁준비에 돌입하게 된다. 방어군을 꾸려 성종이 직접 출전하지만 첫 전투인 봉산군 전투에서 패배하게 됨으로서 전선까지 직접 가고자했던 성종은 서경에 머무르게 된다.
II. 서희의 주장
소항덕이 봉산군을 함락시킨 소식에 서희역시 출전하게 되는데, 소항덕은 무조건적으로 고려의 항복을 요구하여 서희는 명분없이 들어온 요나라가 다른 뜻이 있어 온 것임을 간파해 조정에 요청해 요나라 군 본영에 사신을 파견해서 이유를 묻는데, 옛 고구려의 영토에 대한 소유권 문제와 요나라와 고려간의 국교 체결건임을 알아낸다.
고려 조정에서는 그냥 항복론과 서경 이북 땅을 떼어주고 국경을 새로이 긋자라는 할지론이 나오게 되는데 성종은 할지론쪽 주장에 힘을 실어줘 저장된 곡식을 백성들에게 풀어주고 남은 건 요나라 군이 침입해서 군량미로 뺏을 수 없게끔 서경 사이에 흐르는 대동강에 던져버리도록 명하는데, 이에 서희가 반대의견을 제시한다.
서희는 이렇게 부족하지 않은 식량이 있는데 왜 부딫혀보지도 않고 뺏길생각만 하느냐고 강하게 밀어붙인다. 사실상 요나라의 명분없는 공갈협박에 순순히 당해주면 우리 고려는 다음에 뭘 줄것인가에 할말을 잃은 성종은 서희의 주장을 듣게 된다.
III. 소항덕을 만나다
서희는 외교임무를 자처해 요나라 군대 군영으로 들어가 소항덕(소손녕)을 만난다. 소항덕은 대국에서 온 고려의 기세를 꺾고 외교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서희를 하대하는데, 서희는 이에 동등한 관계의 대신자격에 머리를 굽힐 수 없다고 맞받아치면서 소항덕이 한수 물러나 예를 갖추고 회담을 가졌다는 일화가 있다.
III-1. 고구려 문제
소항덕의 주장은 고구려땅은 자신들이 차지했고, 고려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난 국가로서 왜 옛 고구려 영토를 침략했느냐고 하는 것과 왜 국경을 맞닿은 요나라가 아니라 바다건너 송과 사대관계를 맺는 것인가인걸 묻는다. 이에 서희는 고려라는 국호 자체가 고구려의 후예(고구려는 장수왕대에 고려로 국호를 개칭했음)임을 보여주는 것이고, 고구려의 수도 서경이 현재 고려에서는 서쪽에 위치한 수도였다고 반박하고, 영토는 이미 고구려 광개토태왕(374~413, 재위391~413)대에 요나라 영토가 고구려의 영토였다는 것임을 반박한다.
III-2. 왜 송나라하고만 사대관계여?
그리고 왜 바다건너 송나라하고만 사대를 하느냐라는 주장에는 고려 역시 요나라와 친교를 맺기위해선 압록강을 건너야 하는데, 그 사이에 버티고있는 여진족 세력이 길을 막아버려 다니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고 고려 정부가 이 지역 여진족을 몰아내고 성을 쌓고 길을 만들게 해준다면 언제든 요나라에 사신을 보낼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결과
그렇게 소항덕은 서희와의 담판내용을 요 성종(야율융서, 972~1031, 재위982~1031)에게 보고하여 황제가 이를 수용하고 전쟁을 즉시 중단하라는 명을 내리게 되면서 제1차 고려-거란전쟁은 이렇게 마무리가 된다.
서희는 요나라로부터 고려 서북방 강동6주(흥화진, 용주, 통주, 철주, 귀주, 곽주)를 획득하고 소항덕에게 낙타, 말, 양, 비단등을 선물하고 다시 돌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