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 정몽주, 1338~1392
출생
1338년 고려 경상도 영천군(현 경북 영천시)에서 아버지 정운관(?~1355)과 어머니 영천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남.
배경
고려 삼은중 한명. 삼은(三隱)은 은(隱)이라는 호를 가진 고려 후기 3명의 학자를 일컬음.
본관 | 생몰년도 | |
목은 이색 | 한산 | 1328 ~ 1396 |
포은 정몽주 | 연일 | 1338 ~ 1392 |
야은 길재 | 해평 | 1353 ~ 1419 |
목은 이색은 성리학의 선두주자로서 이를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고려를 개혁하고자 했던 성리학자, 포은 정몽주는 문무를 모두 겸비한 성리학의 시조격 인물, 야은 길재는 이색과 정몽주의 제자로서 세대차이가 나는 인물이지만, 이후 조선 왕조가 1392년에 세워지고 난 뒤에도 조선왕조를 섬기지 않고 이후 김종직(1431~1492)이 길재의 맥을 이어 사림의 바탕이되는 시조격 인물이다.
고려의 마지막 충신답게 신진세력의 고려를 무너뜨릴 역성혁명을 반대하면서 고려를 지키려다 이성계(미래의 태조, 1335~1408, 재위1392~1398)의 5남 이방원(미래의 태종, 1367~1422, 재위1400~1418)일파에게 선죽교에서 암살당한다. 원래 선지교였던 선죽교는 정몽주가 암살당한 자리에서 대나무 한그루가 솟아올랐다 하여 선죽교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문무 통합형 인재
문무를 겸비한 대신이라는 어마무시한 배경은 어린시절부터 비범한 모습을 보이면서부터 시작된다. 학문에 매우 뛰어나고 깊어 1357년(공민왕6년)에 국자감시에 합격, 불과 만22세인 1360년(공민왕9년)에 문과 장원급제를 하면서부터 관리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정9품 예문관검열로 임명되면서 첫 관직생활을 시작하면서 공무를 수행해 나가면서 1364년(공민왕13년)엔 동북면 도지휘사 한방신(?~1376) 함께 종사관으로서 고려-여진 국경지대인 북방 화주(현 함경남도 영흥)에 이성계와 함께 여진족을 화주에서 몰아내면서 적장의 목을 베는등 전공까지 세워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본격 부각되기 시작한다.
정몽주는 전우로서 화주에서 함께 싸우던 이성계의 인품에 감복해 이후 이성계를 지지하는 세력이 된다. 다시 개경 궁으로 복귀한 후 정랑, 박사, 사예등의 직책을 임명받지만 사양.
성리학
1366년(공민왕15년), 공민왕(1330~1374, 재위1351~1374)이 신돈을 등용하며 본격적인 개혁정치를 실행함에 따라 찰리변위도감을 전민변정도감으로 개명시켜 개혁을 서두르게 되는데, 1367년(공민왕16년)에 신진세력을 육성하기위해 교육제도를 개편하기 시작한 공민왕은 교육기관인 성균관을 재건해 종4품 내사사인이던 목은 이색을 정3품 성균관 대사성과 겸직하여 성균관의 우두머리로 삼고, 정5품 예조정랑이던 정몽주역시 이때 정7품 성균관 박사를 겸직하게 된다.
당시 자료가 많이없던 성리학을 강연하던 정몽주는 성리학의 내용이 너무 우월해 사람들에게 처음엔 의심을 받다가 자료들이 고려로 들어오게 되면서 비로소 인정받게 된다. 몸소 성리학적 가치를 행동으로 보이면서 100일만에 장례를 마치던 걸 3년으로 강조해 성리학의 근본인 부모에 대한 효를 강조하고 제사문화를 들여와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행동들을 보이게 된다.
1368년(공민왕17년)에 중원에선 명나라 초대 주원장(1328~1398, 재위1368~1398)이 원나라 수도 대도(북경)를 점령함으로서 국호를 명으로 하고 원나라를 북쪽으로 쫓아내는데 이에 고려정부에서는 원나라를 그대로 섬기자파와 명나라를 섬기자는 파가 생겨나게 되면서 대립관계가 형성되게 된다.
유배
1374년 공민왕이 자제위의 홍륜(?~1374)에게 시해당하고 우왕(1365~1389, 재위1374~1388)이 즉위하게 되는데, 당시 명나라의 눈치를 보던 고려의 입장에서 문책이 있을까 두려워 권문세족 권신 이인임(1312~1388)이 명나라 사신을 죽이고 원나라와의관계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되면서 정몽주는 정도전(1342~1398)등과 함께 이인임 일파의 계획을 저지하고자 들고일어나지만 결국 저지당하고 삭탈관직당하고 국문후 경상도 언양으로 유배당한다. 1376년이 되어서야 유배에 풀려남.
주원장이랑 협상한 썰 푼다
그러나 1380년대에 들어 북원이 명나라에의해 거의 손쓸 수 없는 지경까지 다다르게 되면서 고려는 명나라의 눈치를 더욱 볼 수 밖에 없겓되는데, 명 초대 주원장은 계속해서 고려에 공물을 요구하게 되면서 고려 정부에 부담이 되자 정몽주가 직접 명나라로가서 주원장을 알현해 고려 작금의 상황을 잘 설명하게 되면서 주원장의 요구를 절반이상 감면하게 되는 등 외교적 성과를 보인 정몽주를 고려 정부에서도 이제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영향력을 지니게 된다.
고려를 지키자
정몽주는 이성계와 공조하는 같은 노선을 가지고 있었는데, 1389년 창왕(1380~1389, 재위1388~1389)이 폐위되고 즉위한 공양왕(1345~1394, 재위1389~1392)이 즉위하게 되면서 틀어진다. 정몽주는 이성계가 정도전과 함께 고려를 멸하고 새로운 왕조를 창건하는데 대한 반대의사를 표명하며 점점 이성계를 견제하는 쪽으로 움직이게 된다.
공양왕이 폐위되는 상황을 최대한 막고자 정몽주는 이성계 일파를 적으로 간주하고 공양왕의 재가를 받아 이성계 세력을 몰아낼 명분을 찾고있던 때, 1392년(공양왕3년)수시중 이성계가 황주에서 낙마사고를 당해 조당에 나오지 못할 만큼 거동이 불편한 상황을 틈타 이성계 세력을 숙청하고자 시도한다. 이성계 측 핵심인물인 정도전(1342~1398), 조준(1346~1405)등등을 탄핵하면서 처형하게끔 해 완전히 이성계의 손발을 자르고자 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5남 이방원(미래의 태종)이 이런 상황을 미리 예견해 아버지 이성계를 황주에서 개경으로 옮기는 계획을 실행해 성공시키며 이성계 일파를 처형까지는 못시키게 된다. 이성계는 어떻게든 정몽주를 자기세력으로 만들기 위해 5남 이방원을 통해 설득시키게끔 한다.
하여가, 단심가
이성계의 병문안(실상은 이성계의 상태를 보러온 것)을 온 정몽주를 이방원이 맞게 되면서 이방원은 정몽주에게 하여가를 읊으며 아버지의 세력으로 끌여들이고자 하지만, 정몽주는 이에 단심가로 답하며 제안을 거절하게 된다.
하여가 - 이방원 | 단심가 - 정몽주 | |
내용 | 이런들 또 어떠하며, 저런들 또 어떠하리. 성황당의 뒷담이, 무너진들 또 어떠하리. 우리들도 이 같이 하여, 죽지 않은들 또 어떠랴. |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
암살
결국 설득하는데 실패한 이방원은 정몽주를 암살할 계획을 준비하는데, 1392년 5월 이방원은 수하 조영규(?~1395), 고여(?~1402)를 보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암살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고려의 마지막 수호세력이던 정몽주가 암살당하며 모두 숙청되고, 더이상 버틸 수 없었던 공양왕이 물러남으로서 고려왕조는 475년(918~1392)의 역사를 뒤로하고 멸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