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사건/조선

갑자사화

Mintaka5 2024. 11. 1.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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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사화(1504)

조선 10대 임금 연산군(1476~1506, 재위1494~1506)이 1482년 어머니인 폐비 윤씨(1455~1482)가 폐출되고 사약을 받고 사사될때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 국문 후 처형. 이럼에도 사화가 확대되어 당시 사사에 관련되었던 훈구 세력들까지 화가 미친 사건.

 

배경

폐비 윤씨는 1476년 성종(1457~1494, 재위1469~1494)의 첫번째 왕비 공혜왕후 한씨(한명회의 딸, 1456~1474)가 1474년 서거하고 2년뒤 두번째 왕비가 된다. 그러나 남편인 성종에게도 불경한 말을 할 뿐만아니라 부도덕성(의경세자의 후궁 귀인 권씨집에 소용 정씨와 숙의 엄씨가 윤씨 본인과 원자인 연산군을 해하려 한다는 내용을 적은 투서를 날리지만 주변사람을 시켜 꾸며낸 일이였음)과 저주행위(굿을 하는 방법적은 서책, 나무패의 말뚝을 박는 주술행위등)등으로 성종과 대왕대비(정희왕후, 세조의 왕비, 1418~1483)가 윤씨를 폐출하기로 결심을 하고 1479년 중전 윤씨를 교지를 내려 폐위한다. 

그리고는 3년뒤 성종은 폐비 윤씨를 사사하기에 이르는데, 연산군이 자라면서 공공연한 비밀로 굳혀지지만(당시 집권파 사림 계열들은 성종이 사후 100년간 이 일을 언급하지말라는 명을 받는다) 그러나 연산군은 당시 임사홍(1445~1506)의 밀고로 이미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이후 성종이 1494년 승하하고 연산군이 즉위하면서부터 점점 복수의 칼날이 드러내지게 된다.

 

과정

I. 이제 입들 다물라

연산군은 1494년 즉위 초부터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복권과 추숭에 노력을 기울이는데, 당시 집권당이던 사림파 인사들은 성종의 명(100년간 비밀)을 앞세우면서 연산군이 추진하려는 복권에 반대를 하는데.. 이미 모든 사실을 임사홍의 밀고로 알고있던 연산군으로서는 이들이 얼마나 아니꼽게 보였을까.. 

그래서 직언으로 인해 시끄러워지는 구석을 없애버리기 위해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를 대폭 축소하고 심지어는 삼사중 사간원, 홍문관 그리고 예문관까지 없애버리고 모든 이야기거리가 나올만한 직책을 혁파하고 감축하기에 이른다. 

거기다가 학문의장인 성균관을 술판으로 만들고, 사찰은 연회장이 되어버린다. 연산군의 성품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II. 요거 잘만하면 기회되것는디?

연산군이 이렇게 사림 세력들을 부정적으로 보고 독단을 행하게 되면서 훈구파 대신들은 이기회에 자신들의 세력확장이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되며 음모가 슬슬 난무하게 된다. 1498년 훈구 세력들은 무오사화로 사림파를 몰아내고 사실상 일당체제나 다름없을만큼 단일화된 정치세력이 되지만..  무오사화이후 훈구파는 궁중파와 부중파로 나뉘는데 둘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설명 핵심인물
궁중파 왕실 보호, 중앙 집권 체제 유지(특권층) 왕실외척(신수근*, 임사홍**)
부중파 지방세력, 중앙 집권체제 불만세력(지방층, 권력에서 배제됨) 유자광

*연산군의 왕비 폐비 신씨(1476~1537)의 아버지. 신수근의 매제가 연산군인 것.

**장남 임광재(1464~1495)는 예종의 딸 현숙공주와 혼인, 4남 임숭재(1475~1505)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와 혼

 

III. 분열과 조짐

위 표처럼, 훈구파가 분열되고 대립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무오사화(1498)가 종료된지 6년이 지난 1504년에 터지는 갑자사화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소수의 궁중파(왕실 외척)가 다수의 부중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독차지하기 위해 분열이 난 것. 

연산군은 술과 유흥을 즐길 비용(이미 백성은 쥐어짜낼데로 짜내서 반감이 극에 달함)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훈구 세력의 재산에 손을 대기시작하면서 점점 불씨가 붙게 되는데..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감정적으로 확 다 죽였다는 것으로 잘못아는 분들도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왕권 강화정도가 아닌 절대왕권을 원했던 연산군이였기 때문에 단계적으로 진행.

 

IV. 사화의 시작.. 내용이.. 글쓰면서도 머리가 아픕니다

폐비 윤씨가 사사될때 마실 사약을 직접 전달했던 이세좌(1445~1504)로부터 시작되는데.. 안그래도 절대왕권을 구축하는데 걸림돌이되는 훈구세력을 제거하고자했던 마음을 먹었을 때, 1503년 9월 연회장에서 이세좌가 연산군의 용포에 술을 엎지르는 일이 발생하는데, 정말로 실수였던 이세좌의 간청에도 연산군은 '위를 능멸하는 풍습'을 운운하면서 이세좌를 유배보내기에 이른다. 

거기다가 1504년 2월 연산군의 간택령으로 종2품 경기도 관찰사 홍귀달()의 손녀를 입궁시키라는 명을 받는데 홍귇달이 이를 거부하면서 거부에 대한 이유를 써서 연산군에게 올리면서 분노폭발한 연산군은 유배갔던 이세좌의 아들과 사위들까지 모두 곤장을 치고 유배를 보내버린다.

그리고 1504년 3월 폐비 윤씨를 모함했던 아버지 성종의 후궁들인 귀인 정씨(?~1504)와 귀인 엄씨(?~1504)를 결박하고 직접 구타해버리는데도 모자라 귀인 정씨의 두아들 안양군 이향(1480~1505)과 봉안군 이봉(1482~1505)까지 붙잡아 이들로하여금 귀인 정씨와 엄씨에게 몽둥이로 때리라고 지시한다. 안양군 이향은 어두워 보이지 않아 구타를 하지만 봉안군 이봉은 어머니가 있음을 알고 차마 못때리면서 연산군은 이에 또 분노해 사람을 시켜서 두 귀인을 죽여버린다. 

그후 폐비 윤씨가 폐출되고 성종의 새 중전이 된 자순대비 윤씨(중종의 모후, 1462~1530)에게도 협박하는데 연산군의 중전이였던 신씨가 연산군을 뜯어말리면서 돌아간다만.. 그다음은 할머니인 인수대비(소혜왕후, 성종의 어머니, 1437~1504)의 처소에 안양군 이향과봉안군 이봉의 머리채를 잡고 쳐들어가 억지로 할머니에게 술을 올리게하고 자기 어머니(폐비 윤씨)를 왜 죽였냐고 따지면서 온갖 협박을 하다가 돌아간다. 이후 인수대비는 손자의 행동에 충격을 받아 화병을 받아 안그래도 안좋았던 건강이 악화되면서 1달뒤에 서거한다. 

 

V. 숙청

갑자사화 숙청의 시작. 폐비 윤씨를 폐출하려고 할 때 찬성했던 대신들과 이미 사망한 대신들을 부관참시에 처하고 제자, 가족들까지도 숙청을 단행한다. 

  생몰년도 품계, 직위
윤필상 1427 ~ 1504 정1품 영의정
이세좌 1445 ~ 1504 정2품 예조판서
이극균 1437 ~ 1504 정1품 우의정
김굉필 1454 ~ 1504 정5품 형조좌랑
성준 1436 ~ 1504 정3품 상계 좌부승지
권주 1457 ~ 1505 정3품 상계 홍문관 부제학
이주 1468 ~ 1504 정6품 사간원 정언
  당한 인물
부관참시 남효온,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한치형, 어세겸, 심회, 이파

이들의 시체는 모든 문무백관들이 보게하고, 시체를 찢어 사방에 돌려 보이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잔인한 형벌들이 매일같이 진행되는것에도 계속해서 사화가 확대되면서 이제는 연산군에게 간언, 직언하는 자들도 모두 숙청되면서 그누구도 연산군에게 말한마디 할 수 없게된다.

연산군의 컴플렉스를 임사홍과 신수근이 잘 활용한 사화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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