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서의 변(1527)
작서(불에 탄 쥐)의 변이라는 뜻의 무고사건.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누가 일으켰다라는 것이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사건. 조선11대 중종(1488~1544, 재위1506~1544)시대때 발생한 사건으로, 결론적으로 경빈 박씨(?~1533)와 복성군(1509~1533) 모자가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폐서인 된 사건.
배경
1506년 진성대군(중종)을 필두로 한 세력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중종으로 옹립한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이 때 반정세력들은 신수근(1450~1506)에게 반정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하지만 신수근이 이를 거부하게되면서 정보발설의 위험을 이유로 철퇴로 때려죽인다. 이후 반정에 성공하고 난 뒤, 중종은 이미 신씨(신수근의 딸 단경왕후 신씨, 1487~1558)와 혼인한 상태였는데, 연산군의 매제인 신수근의 딸이라는 것에 중종반정이후 반정공신을 필두로 중종은 조강지처를 어떻게 버릴 수 있냐며 주저했지만, 연산군과 연관되어있는 신씨를 중전에 앉히면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중전이 된지 1주일만에 폐위된다. 공신들은 혹시나 자기들이 때려 죽인 신수근의 딸인 단경왕후 신씨가 자기들을 죽이려할까봐 폐위시키는데 혈안이 되었던 것.
결국 중종은 단경왕후 폐위이후, 공신들의 딸 3명을 후궁으로 삼는데 다음과 같다.
생몰년도 | 비고 | |
숙의 박씨 | ? ~ 1533 | 경빈 박씨. 작서의 변에 연루되어 아들 복성군과 사사됨 |
숙의 홍씨 | ? ~ ? | 해안군(1511~1573)의 생모 |
숙의 윤씨 | 1491 ~ 1515 | 윤여필(윤임의 아버지, 1466~1555)의 딸, 조선12대 인종의 생모, 중전에 오르면서 장경왕후 윤씨가 됨 |
이중에 숙의 윤씨가 중전이 되는데, 1515년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서거. 서거이후 새로운 중전을 뽑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발단
경빈 박씨는 당시에 중종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던 후궁이였는데, 1509년 복성군(1509~1533)을 낳지만 후궁 출신의 아들은 왕위 계승서열에서 거리가 있었는데.. 1515년 중전인 장경왕후 윤씨가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서거하면서 경빈 박씨가 욕심을 내게 된다.
중전자리가 비어있는틈에 자기가 중전이 되면 복성군이 적자가 되면서 왕위를 이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그렇지만 경빈 박씨는 빈약한 집안출신인 탓에 욕심을 부렸으면 안되는 형편이였는데, 중종은 총애하던 경빈 박씨를 중전으로 삼고싶어했었다.
이에 대신들이 경빈 박씨의 미천한 배경을 따지면서 중전이 될 수 없다고 주장. 이미 태어난 적장자가 있는데 경빈 박씨가 중전이 되면 세자책봉문제가 꼬여 정치적인 문제로 발전할 수 있다던 대신들의 주장에 탄력이 붙으면서 결국 중종은 경빈 박씨를 중전으로 책봉하는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중전을 찾게되는데,
새로운 중전은 이후에 숱한 이야기거리가 나오게 되는 문정왕후 윤씨(윤지임의 딸, 윤원형의 누나, 1501~1565)이다.
사건 발생
1527년(중종21년) 3월, 세자(인종)의 12번째 생일(1515년생)에 누군가가 세자궁에 죽은 쥐의 사지를 찢고 쥐의 눈을 불태워 세자의 침실 창 바깥에 걸어두었다는 궁녀들의 보고가 들려오게 되면서 궁이 뒤집혀버리는데, 세자에 대한 저주로 여겨진 이 사건은 중종에게까지 알려지게 되면서 해당사건에 대한 조사가 전반적으로 들어가는데, 사건 현장을 처음으로 목격한 상궁인 안씨(창빈 안씨, 1499~1549)의 여종, 세자궁의 시녀들이 조사를 받는데 그중 경빈 박씨를 모시는 궁녀인 범덕이 말을 잘못하는 바람에(쉴드 잘못침..) 안그래도 그전부터 중전에서 2번이나 밀린 경빈 박씨가 인종을 미워해 했다는 식으로 풀이가 되어버려서 결국 중종조차도 개입해서 직접 조사를 하게된다.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가 거론되면서 조사가 계속 진행되는데,
그러나 자순대비(중종의 모후, 1462~1530)가 경빈 박씨의 첫째 딸 혜순옹주(1512~1584)의 여종들이 인형을 만들어 인형을 참수하는 흉내를 내면서 저주를 했다는 얘기를 교지로 내린다. 사실상 경빈 박씨를 범인으로 여긴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붙잡힌 경빈 박씨, 혜순옹주의 여종들은 고문을 받게되지만 아무도 경빈 박씨가 범인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결론이 나지 않고, 증거도 없었기 때문에 중종은 경빈 박씨를 비호하고싶었지만 모후 자순대비가 경빈 박씨를 사실상 범인으로 여기고 있었기에 중종에게 압박을 넣으니 중종으로서도 어쩔수가 없었는듯.. 결국은 경빈 박씨는 복성군, 딸 혜순옹주, 혜정옹주와 함께 폐서인된다.
가작인두의 변
그러나 1527년 작서의 변 6년뒤인 1533년(중종27년)에 동궁(세자궁)남쪽에서 저주의 흔적이 발견되면서 난리가 난다. 종이로 인형을 만들어 목패에 글이 써져있었는데, 대략적으로 세자(인종)을 늦이하고, 중종을 교살하고 또한 중전 문정왕후를 참할 것이라는 끔찍한 내용이 담겨져있었다. 거기다가 목패 뒷면에도 병조 서리 한충보외 15인이 행한 일이라는 글귀가 쓰여있었다. 어느누가 자기들이 했다고 글로 남겼겠냐는 의심이 들만한 대목이다.
목패 뒷면에 쓰여있던 한충보와 15인을 모두 조사하지만 별소득이 없었는데.. 그러나 한충보가 홍려(혜정옹주의 남편, ?~1533)의 하인이 한 일이라는 자백이 나오게되면서, 이미 저주사건으로 작서의 변을 치뤘던 이미 폐서인된 경빈 박씨와 복성군, 혜정옹주의 남편 홍려가 연루되면서 대간들의 탄핵을 받는다. 그렇게 해서 대신들은 이들을 사사하라는 주문을 중종에게 넣지만 중종은 반대하다가 지속된 주청으로 인해 결국 경빈 박씨와 복성군은 사사된다. 경빈 박씨의 사위 홍려는 고문끝에 사망.
임금과 세자를 저주하는 가작인두를 만들어 저주했다는 뜻에서 가작인두의 변(1533)이라고 불린다.
마지막으로
1541년(중종35년)이 되어서야 경빈 박씨와 복성군 모자는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에서 신원이 회복된다. 당시에 이 모자말고도 의심가는 존재(김안로, 문정왕후등)들이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누가 이 변을 주도했는지는 모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