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사화
1519년(중종13년)11월(음력)에 조선 11대 임금 중종(1488~1544, 재위1506~1544)의 주도로 신진 사림파 핵심인물들을 훈구세력에 의해 숙청당한 사건. 신진 사림의 영수 조광조(1482~1520)가 훈구 공신 세력에 의해 탄핵당하고 유배형에 처해지면서 덩달아 수많은 사림 세력들이 처형당하거나 유배형에 처해진 사건이다.
배경
김종직(1431~1492)의 [조의제문, 1457]의 여파로 무수한 성리학자들이 무오사화(1498년), 갑자사화(1504년)로 숙청당하며 유학이 쇠퇴하고 무수한 공포정치를 펼친 조선10대 임금 연산군(1476~1506, 재위1494~1506)이 1506년 진성대군(미래의 중종)을 주축으로 한 성희안(1461~1513), 박원종(1467~1510), 류순정(1459~1512)등의 훈구세력이 연산군을 폐위시킨다. 이를 중종반정이라 한다.
연산군이 폐위되고 진성대군이 조선 11대 중종으로 즉위하고 자신을 사실상 옹립시킨 훈구세력들이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사실상 훈구세력에 의해 옹립된 중종은 반쪽짜리 권력이라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있었는데, 중종은 이에 훈구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위해 연산군때 일시적으로 쇠퇴한 성리학을 장려하기위한 명분으로 신진 사림 세력을 등용하게된다.
수많은 신진 사림 세력들 중 단연 눈에 띄는 자가 바로 조광조(김굉필의 제자, 1482~1520)였다.
내용
I. 조광조
조광조는 아버지 조원강이 1498년 무오사화(사림인 김종직일파의 실록사초문제로 인한 숙청)로 인해 평안도 희천(현 북한 자강도 희천시)에 유배중일 때 우연히 김종직의 문하였던 김굉필(1454~1504)을 만나게 되면서 김굉필이 어린 조광조의 영특함을 알아보고 그를 가르치게 된다.
중종반정 4년이후인 1510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입학해서 그 실력을 점차 보이게 되는데, 성리학의 정통이라고 불리는 김종직-김굉필-조광조의 정통 계보를 이었다고 할 정도로 성리학에 뛰어났던 조광조는 1515년 알성시(군주가 성균관 문묘에 있는 공자의 신위에 술을 올리는 의식을 행하고 난 뒤 치르는 시험)문과 을과로 급제하면서 본격적으로 관직에 나가게 되면서 정6품 성균관전적이 된다.
이 알성시때 제출했던 답안을 중종이 보고 조광조를 직접불러 정세를 논한 결과 그 능력이 출중하다 여겨 최측근으로 기용하게 되면서부터 중종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II. 급진적 개혁
중종은 조광조의 학문적 혜안과 능력을 높이 평가했지만, 조광조의 개혁성향이 너무 급진적인 성향이 문제였다. 물론 중종도 조광조를 기용한데는 그 과감한 진행력이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생각보다 너무 거셌다.
미신 타파를 내세우며 소격서 철폐(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관청)주장, 현량과(학문과 재주가 뛰어난 인재를 천거해 군주가 직접 면전에 선발해 관리로 기용하는 시스템, 성균관을 안거쳐도됨)시행으로 인한 폐단등으로 훈구 세력들의 반발을 일삼게 된다.
III. 위훈삭제
앞서 소격서 철폐는 중종이 반대했지만 조광조 일파 대간들이 출근을 하지않고 파업을 선언하면서 온갖 중종이 잘못된 생각을 가졌다는 등의 상소가 올라오면서 비난이 일면서 조정의 업무자체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면서 중종이 결국 소격서 철폐를 지지하게 되어버린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1519년 중종반정 공신 위훈 삭제라는 엄청난 일을 두고도 조광조의 사림 일파들에게 항복할 수 밖에 없어지면서 점점 조광조를 없애야겠다는 생각이 올라오게 된다.
IV. 기묘사화 과정
중종(1488~1544, 재위1506~1544)은 결국 조광조 일파를 쓸어버리기로 결심하는데.. 평소 조광조의 행태에 불평이 많던 남곤을 비롯한 훈구 대신들중 홍경주(?~1521)의 딸 희빈 홍씨(정1품)가 중종을 모시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후궁들에게 조광조를 같이 없애자는 밀약을 맺게 된다. 중종역시 이 훈구 대신들에게 밀지를 내려서 조광조를 필두로 한 사림 세력들을 잡아들이라고 지시하게 된다.
아래표는 기묘사화 주동의 핵심3인방.
성향 | 생몰년도 | 비고 | |
남곤 | 초기 사림 | 1471 ~ 1527 | 정1품 영중추부사, 김종직의 문인 |
심정 | 훈구 공신 | 1471 ~ 1531 | 정1품 좌의정 |
홍경주 | ? ~ 1521 | 종1품 좌찬성, 2녀 희빈 홍씨(1494~1581)가 중종의 후궁으로 들어 |
이는 순식간에 벌어진다. 체포와 즉시 처벌이 내려져 유배보내지고, 중종반정 공신 위훈삭제는 취소되어진다. 조광조는 사림 세력들과 함께 옥에 갇히면서 사사령이 떨어졌지만 영의정 정광필(훈구, 1462~1538 )의 비호로 유배령에 떨어진다.
조광조가 유배지로 간 후 중종은 죽일생각까지는 없었는데, 그러나 이에 성균관 유생들이 집단시위를 벌이게 되면서 처벌의 수위를 높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게 되면서 유배지로 배소되었던 조광조등 사림 세력이 사사된다. 위에서 사사되기전의 조광조를 비호했던 영의정 정광필은 좌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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