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급 귀족 & 관리/조선

89대, 91대 영의정 이항복(오성)

Mintaka5 2024. 9. 1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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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Hang-bok, 1556~1618, 영의정 재임1600~1602, 1604

이항복,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556년 조선 한성부에서 아버지 참찬 이몽량(1499~1564)과 어머니 전주 최씨(?~?)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전래동화 오성과 한음에서 오성역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오성은 이항복의 작위인 오성부원군에서 따온 것. 이항복의 호는 명보. 1580년 과거급제부터 평생의 동지가 된 이덕형과 영혼의 단짝. 당색은 비록 달랐지만 끝까지 우정을 지키며 서로를 위해줬던 진정한 영혼의 단짝. 

말년엔 광해군 즉위이후 임해군(1572~1609)사사문제, 인목대비(1584~1632) 폐위건, 영창대군(1606~1614) 사사문제 등으로 피곤한일들이 많았고, 유배를 갔다가 유배지에서 사망한다.

 

같이 일하재이?

 아버지 이몽량(1499~1564)이 이항복이 8살일때 사망하면서 어머니 밑에서 자라게 되는데, 어머니의 열정적인 보살핌으로 학업에 열중해 1580년 문과로 급제해서 승문원에 들어가게 된다. 이 때 영혼의 단짝 이덕형(1561~1613)을 만나게되는데 이 둘을 유심히 지켜보고 보통인물됨이 아님을 알아차린 이조판서 이이(1536~1584)가 이 둘을 1583년 이덕형과 함께 사가독서(학문을 닦던 제도)를 시키게 하여 참의, 정랑등을 거친다. 

 

기축옥사

앞선 이덕형 게시물에도 언급했지만 기축옥사 때 이항복이 정5품 예조정랑에 있을 때였는데, 정철()과 함께 위관으로서 정여립의 난의 해결을 맡으면서 최대한 피해를 막고자 했던 점에서 주변의 인정을 받으면서 정철과는 다르게 오히려 욕을 덜먹고 공정했다는 평을 받는다.   

이 정여립의 난을 잘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 3등에 녹훈되었음.

 

임진왜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동래성 점령이후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는 왜군을 피해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가 피난을 갈때 도승지(정3품, 현재의 대통령 비서실장격) 로서 선조를 최측근에서 수행한다.   

개성, 평양, 의주까지 선조를 무사히 호종하면서 피난 도중에 종2품 이조참판에 임명되면서 오성부원군에 봉해진다. 절친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에 원병을 청할 것을 선조에게 건의해서 이덕형이 상국인 명나라로 가서 만력제(1563~1620, 재위1572~1620)를 알현해 설득하여 구원병을 데리고 오게 된다. 

조승훈(?~?)을 사령관으로 한 명나라 구원병이 처음부터 대규모는 아니였고 수천의 규모였다가, 첫전투부터 패해버리면서 다시 대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면서 이여송(1549~1598)을 사령관으로 한 대병력이 조선으로 들어와 조선군과 함께 합세해서 평양성을 탈환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해서 한양을 탈환하게 된다. 한양탈환 이후 이항복은 1593년 선조가 세자 광해군을 경상도와 전라도지역의 분조로서 지휘를 명했을 때 광해군을 최측근에서 수행하면서 보필한다.  

임진왜란 기간동안 이항복은 여러 조정의 요직들을 거치면서 이덕형과 함께 외교적으로나 조선 내적으로나 사건이 터지거나 오해가 발생했을 시 즉시달려가서 중재를 하여 안정과 더불어 성과까지 취했다는 점에서 매우 유능했던 대신들이였던 건 확실하다.   

 

왜란 이후

1598년 7년간의 길었던 전쟁이 끝나고 황폐화된 조선을 복구시키기위해 이덕형과 함께 애쓰게 되는데, 이미 둘다 정승의 반열에 오른 상태였고(이덕형은 1598년 이미 좌의정), 이항복은 도체찰사로서 전후 민심을 수습하고 군을 정비하는 등의 업무를 충실히 수행해 정1품 영의정에 임명되게된다.   선조는 이때 이항복, 이덕형 뿐만아니라 임진왜란때 국란극복을 위해 고군분투한 대신들을 포상하기 위해 공신록을 작성케끔 해 이들의 공을취한다. 이항복은 1604년 선무원종공신1등, 1605년 청난원종공신1등에 책록되는등 그 공로를 취하받는다. 

 

사망

선조가 1608년 승하하면서 광해군(1575~1641, 재위1608~1623)이 즉위하게되면서도 계속해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면서 전후 복구에 애쓰고있었는데, 1609년 임해군(1572~1609)사사문제 때 사사 반대를 외치면서 탄핵을 받는등 위기가 발생하게된다. 이 과정중간에 1612년 절친 이덕형이 병을 이유로 삭탈관직 되어 경기도 광주 사저에 머무르다가 사망하게 되면서 영혼의 단짝을 이때 잃고마는데.. 이항복은 이 이후로 관직에서 물러나 조용히 살고 있었는데..

더욱 큰 파동은 1617년 인목대비(1584~1632)폐위에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서인에 가담하기까지 하면서 최대한 막으려고애썼지만, 이때 삭탈관직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면서 그곳에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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