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급 귀족 & 관리/조선

90, 95, 97대 영의정 이덕형(한음)

Mintaka5 2024. 9. 16.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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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Deok hyung, 1561~1613

이덕형 초상,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561년 조선 한성부에서 아버지 정2품 지중추부사 이민성(?~?)과 어머니 문화 류씨(?~?)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전래동화 오성과 한음에서 한음역에 해당하는 인물. 호가 한음이라.. 이덕형의 절친인 오성에 해당하는 이항복(1556~1618)은 호가 오성이아니라 오성부원군 작위에서 따온 것 호는 명보.  다양한 직위를 역임했던 문신으로서 임진왜란, 정유재란때에 명나라 접반관으로서 동행하는 역할을 수행하였고, 전란후 영의정으로 민심수습, 국가정비에 총력을 기울이며 전란후 국가를 재건하는데 힘씀.

그러나 말년에 절친 이항복과 함께 영창대군 처형과 인목대비 폐위을 반대하다가 북인의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되고 사저로 돌아간 이덕형은 이듬해 사망.  

 

너무 빠른데? 

1561년생으로서 1580년 만19세의 나이로 별시에 급제하는데 이때 절친이되는 이항복역시 급제. 둘은 당시 이조판서 율곡 이이(1536~1584)의 눈에 띄면서 율곡이 이 둘을 키워주면서 파격적으로 직급이 올라가는데, 이덕형은 30세에 정2품 예조참판과 더불어 대제학을 겸직하기에 이른다. 

파격적인 인사로 가장 젊은 나이로 대제학에 오른 인물이 이덕형. 

 

오성과 한음

평생동지인 이항복과는 1580년 급제하고 나서 궁에서 만나게 된다. 어린시절 우정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설화 [오성과 한음]은 사실이 아님.

서로 학문이 매우 뛰어나고 케미가 잘 맞아.. 당색은 비록 달랐지만(이항복은 서인, 이덕형은 동인) 당파를 뛰어넘는 우정을계속 지켜나가면서 당의 균형을 맞추기위해 큰사건이 벌어지거나 곤란한 일이 생기면 서로 help를 요청하는 편지를 쓰며 도움을 서로 줄건 주는등 궁 내에서도 우정을 지킨 것으로 보여진다. 

 

기축옥사

대표적인게, 1589년(선조22년) 기축옥사가 발생하면서 이 옥사의 핵심급 인물인 정여립(1546~1589)이 서인으로서 이이(1536~1584)와 성혼(1535~1598)과 친분을 이어오다가 1584년 이이가 사망한 후 바로 동인측에 붙었다는 혐의가 있던 상태였고, 워낙 처세와 계산이 빠른 사람이라 선조()또한 신경이 자꾸 거슬렸던 인물이라,  정계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 1585년경 고향인 전주로 낙향하여 내려놓고 살고있었는데, 

서인의 조헌(당 대변인 격)이 정여립과 동인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면서부터 이 사건이 시작되는데 정여립또한 모반에 휩쓸려 의금부도사 유담이 정여립을 잡으러가는데, 정여립이 도망쳤다고 장계를올리는 바람에 이후 여러 인물들과 반역을 공모했다는 죄목이 씌여지면서 난리가남. 이 국문에서 동인이 직접 조사를 하는데, 정여립 한명에게만 역모죄를 적용시키고 나머지는 조사도 하지않은게 빌미가 되어버려 서인이 이를 동인역시 역모에 가담했다고 상소를 올리는바람에 동인이 이때 2년 천여명정도가 처형을 당하면서 사실상 궤멸되어버리고 북인과 남인으로 쪼개진다.

기축옥사때 이항복은 이덕형이 속한 동인이 처벌에 집중되지 않게 하고, 명백한 죄상을 가려내 피해를 최대한 막고자 노력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되면서, 외교능력에 뛰어났던 이덕형은 왜 사신과도 교섭해 최대한 조선에 피해가 안가는 쪽으로 협상을 시도했지만 결렬되면서 상국이였던 명나라에가서 황제 만력제(1563~1620, 재위1572~1620)를 설득해 원병을 얻어오는데 성공. 임진왜란 때 영의정 류성룡(1542~1607)과 절친 도승지 이항복(1556~1618)과 함께 최대한 전략을 짜내면서 국난을 극복하기위해 애를 쓰는데, 이때부터 각 판서를 맡고 이항복과는 교대로 병조판서를 역임하면서 전시상황의 작전 군편성등을 수행하는데 애썼다.

1597년 정유재란이 터지고나서도 비슷한 상황이였는데, 전쟁이 끝날무렵인 1598년에 정1품 우의정이 되는데 이때당시 나이가 불과 37세에 불과했다. 그런데 우의정이 된지 6개월만에 좌의정으로 또 영전.

 

전란 이후

1598년 7년간의 긴 전쟁이 종료되고 황폐화된 조선을 다시 재건하기위해 애를 쓰게 되는데, 투항한항왜를 몰아내고 민심 수습과 더불어 혹시모를 상황에 대비하기위한 군대 정비에 돌입하면서도 직급은 계속 올라 1602년 재상중 으뜸이자 모든 관료의 최고봉인 영의정에 오르게 된다. 41세에 영의정이 된 케이스로 조선 역사상 최연소기록(왕실종친이 먼저 된 케이스는뺌). 

전후 복구하는과정에서도 동지 이항복과 함께 힘을 합쳐 조선을 다시 재건하는데 앞장섰다.

 

사망

1608년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가 승하하면서 광해군(1575~1641, 재위1608~1623)이 즉위하면서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1572~1609)을 처형하는 과정에서 반대를 외치다 광해군의 눈밖에 나는데, 임해군 처형 반대를 외쳐 탄핵을 받고도 1613년 인목대비(1584~1632) 폐위, 영창대군 사사문제까지 목숨을 걸고 상소를 올려 부당함을 알리다 북인의 탄핵을 받아 병을 이유로 사직상소를 내지만 광해군이 허락하지 아니했다. 이때 이항복은 처형반대를 외치지 않았다(이항복 역시 축출된상태라 반대를 외칠 힘이 없었음) .

이후 삭탈관직되어  사저가 있던 경기도 광주부(현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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