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황제/합스부르크

페르디난트1세(신성로마황제)

Mintaka5 2024. 9. 11.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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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dinand Ier du Saint-Empire, 1503~1564, 로마왕재위1531~1558, 신성로마황제재위1556~1564)

페르디난트1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503년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 알칼라 데 에나레스(Alcalá de Henares)에서 아버지 펠리페1세(Felipe Ier, 1478~1506, 부르고뉴재위1482~1506, 카스티야재위1506)와 어머니 후아나(Jeanne Ier, 1479~1555, 재위1504~1555)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남.

 

배경

1500년대 유럽을 휩쓴 신성로마황제 카를5세(Charles Quint, 1500~1558, 1519~1556)의 친동생이다. 형 카를5세와는 다르게 신중하고 카를5세의 강한 성격으로 사이가 틀어진 귀족과 제국관료들의 가교역할을 하며 중재자 역할을 했던 중심격 인물이였다. 형 카를5세를 대신해 제국회의를주도했으며,  1517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 이후 카톨릭과 개신교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으며,  제국내 종교분열을 막는데 상당한 공을 세운것으로 남아있다.

사실상 형 카를5세의 태제(황제의 동생승계자)로서 제국 내 선제후, 귀족들의 지지를 많이 받고있던 터라, 카를5세 다음황위는 페르디난트의 것이라 봐도 무방했는데, 말년의 카를5세가 아들 펠리페2세(스페인군주,Felipe II, 1527~1598, 재위1556~1598)에게 물려줄 움직임을 보이면서, 반발해 사실상 다음 승계자로서의 입지를 곤고히하며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Paix d'Augsbourg, 1555)에서 제후들의 종교자유를 인정함과 동시에 사실상 페르디난트에게 권리를 모두 넘긴 사건이다. 

이 화의이후로 이듬해 1556년 카를5세는 퇴위하고 페르디난트가 후임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제국2인자

페르디난트는 1531년 황제대관을 받기 전 직위인 로마왕으로 즉위를 하면서부터 사실상 제국2인자로서 전쟁터에 자주 나가던 형 카를5세를 대신하여 제국회의를 주재하고 선제후와 귀족들을 중재하고, 형이 실정을 할때마다 균형을 맞추려 유지한 것 또한 뒷배경에서 노력을 하여 세력을 넓혀나가게 된다. 

사실상 카를5세는 군인왕에 가까웠고, 그 작전과 계획, 기획은 페르디난트1세의 머리에서 나온 것들. 

 

종교전쟁 종식

1531년 카를5세 재위12년, 제국 내 루터교를 지지하던 제후들과 자치령들이 독실한 카톨릭 황제 카를5세가 신교도를 박해하는 것에 반발해 슈말칼덴 동맹(La ligue de Smalkalde, 1531)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로서 제국 내 내분이 일어난다만 오스만 제국의 슐레이만 대제(Soliman le Magnifique, 1494~1566, 재위1520~1566)의 침공등으로 내전은 당장에 발생하진 않지만, 1540년대에 들어서 1546년 카를5세가 제국 내 개신교도들을 박멸할 목적으로 군대를 이끌고 강경진압하고 대승을 거둔다. 

 

성님.. 그러니까 왜 악수를 둔겨

I. 카를5세: 말 들어라이? 으이? 

1550년 피의 칙령(Pancarte de Sang, 1550)을 내려 더욱 탄압의 강도를 높이면서 제국내부적으로 더욱 불만이 거세지게 되는데, 카를5세는 이때 인생 최대의 실수를 자행하고 마는데, 바쁘던 자기를 대신해 제국 내부 일들을 30년간잘 처리해오던 사실상 다음후계자격인 페르디난트를 내치고 아들 펠리페에게 계승하고자 시도했던 것..

이때 거의 모든 제후와 귀족들이 반대하고 나서는데 카톨릭 개신교 할 것없이 모두다 반대. 이미 이전부터 많은 자들이 반대했던 개신교 강경진압과  스페인까지 제국에 끌여들여 자신들의 기득권또한 위협이 되는 상황에 모두가 카를5세로부터 등을 돌린다.

무엇보다 30년간 형이 하지못하던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한 덕분에 이미 제국내 귀족과 선제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더욱이 모가나지 않고 원만한 성격으로 적이 없었다는 것이 형과의 가장 큰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제후들 중 한명이였던 작센 선제후 모리츠(Maurice de Saxe, 1521~1553, 재위1541~1553)가 신교도 세력을 결집함과 동시에 신교도 제후들과 토르가우 동맹()이 체결되고 지도자가 되면서 프랑스 군주 앙리2세(Henri II, 1519~1559, 재위1547~1559)와도 샹보르 조약을 체결해 카를5세에 같이 대항을 하게 된다.    

 

II. 체면이 말이 아니네..

샹보르 동맹군의 침입으로 카를5세가 머무르고 있던 인스브루크(Innsbruck)가 공격당하면서 가까스로 탈출해 필라흐(Villach)에서 제국군 소집을 명하지만 이미 카를5세로부터 등을 돌린 제후들과 페르디난트는 반응도 하지않는데, 형에대한 배신감으로 가득찼던 페르디난트는 한술 더 떠 모리츠와 강화를 체결하면서 카를5세를 완전히 눌러버리면서 1552년 파사우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사실상 카톨릭과 개신교의 화의. 

이로서 카를5세는 완전히 권세를 잃어버림으로서, 아들 펠리페에 대한 승계를 완전히 포기함을 선언한다. 이때가 1553년.  

 

III. 폐하 멀리 안나갑니데이

페르디난트는 파사우 조약이후 사실상 제국의 권력을 다 쥐었다고 봐도 무방했고, 형에게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추진하자고 하는데 이미 모든 힘을 상실한 카를5세는 반대하려고해도 힘이 없어서.. 받아들이게 된다. 

1555년 신교도 제후들의 종교자유에 대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체결된다. 카를5세는 아무런 반발도 할 수 없던 허수아비 황제 신세가 되면서 퇴위를 고려하게 되고, 1556년 공식적으로 자진퇴위를 선언하고 페르디난트가 선출된다.

 

즉위

1556년 페르디난트1세로 즉위하는데 아직 형 카를5세가 승하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형을 마지막으로 존중해 대관식을 미뤄, 1558년 형 카를5세가 승하하면서 대관식을 치루게된다.  그러나 이미 1556년 즉위당시 나이가 53세였다.

 

승하

1560년대 50대 후반의 나이에접어들면서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면서,  장남인 막시밀리안(미래의 막시밀리안2세)에게 섭정을 맡겨 국정을 돌보게 하고 1564년 61세라는 당시로서는 고령으로 승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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