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les VI du Saint-Empire, 1685~1740, 재위1711~1740
출생
1685년 신성로마제국 빈 호프부르크궁에서 아버지 신성로마황제 레오폴트1세(Leopold Ier, 1640~1705, 신성로마재위1658~1705)와 어머니 알리오노르 드 뇌부르(Éléonore de Neubourg, 1655~1720)사이에서 태어남. 위로는 형 요제프1세(Joseph Ier, 1678~1711, 로마왕재위1690~1711, 신성로마재위1705~1711)가 있다.
배경
합스부르크 출신 신성로마황제로, 아버지 레오폴트1세때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루이14세(Louis XIV, 1638~1715, 재위1643~1715)와 계속 대항하고 1700년에 들어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혈통이 끊기면서 카를역시 이때 계승순위에 포함되지만 납득할 수 없는 아버지 레오폴트1세가 루이14세와의 대립으로서 스페인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스페인
병약했던 스페인 왕 카를로스2세(Charles II, 1661~1700, 재위1665~1700)가 1700년 승하하면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혈통이 끊김과 동시에 스페인 군주자리가 공석이 되어버린다. 카를로스2세는 승하하기 전에 프랑스 루이14세의 둘째손자 필리프(미래의 펠리페5세)와 필리프가 왕위를 물려받을 경우를 대비해 셋째손자 샤를(베리공작)을 2순위, 이 둘다 계승을 못할 시, 레오폴트1세의 둘째아들 카를(카를6세)을 3순위로 지명하는데, 레오폴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프랑스 루이14세에게 대항하게 되는데 이것이 1700년부터 14년간 이어지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0~1714)이다.
갑작스런 즉위
1711년 친형 요제프1세(Joseph Ier, 1678~1711, 로마왕재위1690~1711, 신성로마재위1705~1711)가 갑자기 천연두로 승하해버린다. 요제프1세에겐 세 딸이 있었지만 살리카법에 의거 여성은 황위를 계승할 수 없다는 원칙에 의거해 카를이 계승자가 되어 작위들을 물려받고 1711년 신성로마황제에 선출된다.
선출 전, 유럽의 국가들은 16세기 유럽을 휩쓸던 카를5세(Charles Quint, 1500~1558, 재위1519~1556)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을 두려워해 즉위전 압박을 넣는데, 스페인 왕위를 포기하는 대신 다른 세습령을 갖고자 하지만 형 요제프가 죽자마자 스페인까지 가지겠다고 하는 바람에 주변국들의 압박이 더욱 거세지게 되면서 결국 스페인을 포기하게 되면서 루이14세의 둘째손자 필리프가 펠리페5세(Felipe V, 1683~1746, 재위1700~1724,1724~1746)로 즉위하여 스페인 부르봉 왕조를 열게 된다(현재에도 왕조 지속중).
카를은 그렇게 스페인을 양보하고 제후들의 지지를 얻어 신성로마황제에 오르게 되는 것.
황제
I. 국사조칙
즉위한지 2년이 된 1713년 국사조칙이라는 칙령을 발표하게 되는데.. 위에도 언급했지만 신성로마제국은 살리카법을 따르는 제국으로서 여성의 상속을 금지하는 법이였는데, 카를은 이를 수정해 여성의 상속을 할 수있게끔 바꿔서 혼란이 빚어지게 된다. 이는 형 요제프 역시 딸만 남긴채 사망해버리면서 오던 국가적 혼란과 내부 분열의 가능성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고 봐도 됨.
그러나 실제로 보험삼아 적용했던 국사조칙이 카를에게도 적용되어버리는데, 카를도 형 요제프1세와 마찬가지로 딸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후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Marie-Thérèse, 1717~1780, 재위1740~1780)가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되는 신의 한수가 되어버린다.
II. 그럼 우리들은요 삼촌?
이 국사조칙의 시행으로 딸도 계승 가능하게끔 되는데, 그리 따지면 먼저 요절한 형 요제프1세의 딸들이 더 우위에 있어야 하지만, 카를6세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기에 카를의 딸들이 앞서 계승권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잘 안풀리네..
카를6세 통치시기 신성로마제국은 역사상 최대의 강역을 자랑하지만, 카를6세 말년의 실책으로 제국의 기운이 한풀 크게 꺾여버린다. 이는 아버지 레오폴트1세와 형 요제프1세, 본인 카를6세까지 섬기면서 당대의 명장 사부아 공자 외젠(Eugène de Savoie, 1667~1736)의 활약이 사실상 군주의 활약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기 때문..
수십년간 전쟁터를 휩쓸며 승전을 가져다 주던 군주로서는 많이 든든한 신하이자 군인이였기에 제국 내에서도 외젠의 입지는 어마무시했지만, 말년에들어 고령으로 1733년 벌어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총사령관으로 참전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목적한 바를 달성하지만(자신들이 지지하던 아우구스트3세가 폴란드 왕위에 오르게 됨)이전만큼 능력을 보여주지 못해 이 전쟁을 마지막으로 은퇴한다.
그리고 오스만제국과 벌어진 (1737~1739) 전쟁에서 패배함과 동시에 베오그라드 조약으로 인해 이전에 얻었던 영토의 대부분을 잃어 사실상 본전도 못찾는 꼴이 되고 만다.
사위야 니가 황제다이 딸 잘 부탁한데이
1740년 10월 카를6세가 승하하면서 27년전 발동시킨 국사조칙으로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제국 내 영지를 상속받는 군주는 될 수 있었지만 신성로마황제는 승계가 불가능 했기에,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프란츠1세)이 1745년 신성로마황제에 즉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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