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황제/합스부르크

마티아스(신성로마황제)

Mintaka5 2024. 9. 10.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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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ias, 1557~1619, 재위1612~1619

마티아스 황제,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557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아버지 막시밀리안2세(Maximilian II, 1527~1576, 재위1564~1576)와 어머니 마리 도트리슈(Marie d'Autriche, 1528~1603)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남.

 

배경

무능했던 형 루돌프2세(Rodolphe II, 1552~1612, 재위1576~1612)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세력을 점차 확대해나가기 시작하는데, 1608년엔 헝가리, 오스트리아등의 통치권을 받고, 1611년엔 핵심 요직인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하게 되면서 사실상 제국 내 모든 권력을 틀어지게 되면서 루돌프2세는 사실상 허수아비 황제로 전락하고 만다. 

이후 황제로 즉위하는데 이미 수십년간 종교갈등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곪아있는 상태에서 최대한 중재를 하기위해 애썼지만, 7년만에 고령으로 승하하면서 사촌동생인 페르디난트2세(Ferdinand II, 1578~1637, 재위1619~1637)가 즉위하고는 종교 갈등은 더욱 걷잡을 수 없게 흘러간다.   

 

즉위

위의 배경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친형인 신성로마황제 루돌프2세(Rodolphe II, 1552~1612, 재위1576~1612)의 무능함으로 오스만제국과의 전투에서 패배, 종교갈등을 잘 중재, 해결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으로(루돌프2세는 개신교 세력을 강경하게 탄압해서 더욱이 갈등을 부추기는 효과를 내 버린다), 제국 내 루돌프2세에 대한 불만들이 점점 차면서 마티아스가 형의 실점을 자신에게 기회로 삼아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단적인 예로, 신성로마황제를 선출하는 제국 내 선제후들사이에도 개신교 제후들이 있었기에 루돌프2세의 개신교 강경진압은 선제후들의 불만을 자아내기 좋았다. 마티아스는 이 상황을 이용해 중재를 하면서 세력을 늘려보자 했지만, 마티아스역시 카톨릭 신자로서 대놓고 중립을 유지해 이들을 중재하기는 어려운 입장에 있던 처지였다(대놓고 중립을 유지한다면 황명을 어겼다는 구실로 내쳐질 수도 있었기에).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1612년 마티아스가 신성로마황제로 즉위했는데 즉위당시 나이가 벌써 55세였기에..(당시로 치면 고령) 건강이 결코 좋지 않았다. 

 

황제로서 할...어 몸이 영 ..

형 루돌프2세와의 투쟁끝에 1612년 겨우 황제에 즉위했지만, 이미 고령이였고 문제들을 수습하기에도 이미 많이 늦었던 상황이였다.  그래도 일단은 형의 무능으로부터 기대를 안고 즉위를 한 것이였어서 앞서 닥친 혼란들을 수습하기위해 최대한 애를 쓰긴 한다.

I. 종교문제

루돌프2세의 강경진압으로 인해 악감정이 최고조였고 이에 반종교 개혁이 제일 극심했던 시기에, 마티아스는 온건책을 취하고, 개신교에 대해 최대한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감정을 완화시키기위해 최선을 다했다.   

제국 내에 있던 귀족, 영주들은 마티아스의 종교적 온건, 관용책을 열렬히 지지하면서 효과가 나는 것 같아보였지만 실상 근본적인 갈등인 서로의 입장차이를 중재하는데에는 한계를 느끼며 오히려 문제가 더 커져버리는 효과를 내버린다.

II. 30년전쟁 서막

개신교와 카톨릭간의 근본적문제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혼란이 더욱 지속됨에따라 제국 내 영지에서도 혼란이 더욱 커지게 되는데 특히 개신교 세력이 왕성했던 보헤미아에서 큰 사건이 벌어지고 마는데,

 보헤미아는 1617년 마티아스 황제가 사촌동생인 페르디난트(페르디난트2세)를 보헤미아의 왕으로 즉위시켜 통치하게끔 했는데, 페르디난트는 열렬한 카톨릭 신자로서 개신교도들 입장에서는 다시 종교 억압이 있을거라고 반발하여 뜻을 거두라고 하지만, 그게 관철되지 않아 혼란이 더욱 커지게 되는데, 1618년 5월 개신교 지도자들이 황제의 2명의 섭정관과 비서관을 창문 밖으로 집어던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보헤미아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압군을 보내는 과정에서 더욱 그 규모가 커지면서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더욱더 유럽으로 퍼져나가면서 유럽은30년간(1618~1648)의 긴 종교전쟁에 휘말리 만다.

 

승하

1619년 62세의 고령으로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마티아스 황제가 승하한다. 이후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했던 페르디난트가 황제로 선출되며 페르디난트2세(Ferdinand II, 1578~1637, 재위1619~1637)로서 즉위하지만 이미 30년전쟁이 시작된 터에 즉위기간 내내 30년전쟁에 매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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