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프란체스코 델라 로베레 Francesco della Rovere
Sixtus PP. IV, 1414~1484, 재위1471~1484
출생
1414년 제노바 공화국 첼레리구레(Celle Ligure)에서 아버지 레오나르도 벨트라모 디 사보나 델라 로베레(Leonardo Beltramo di Savona della Rovere, ? ~1430)와 어머니 루치나 몬레오네( Lucchina Monleone, 1390~1430) 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부유한 의류상의 아들로 태어난 로베레는 어린시절 첼레리구레에 인접한 사보나(Savona)에 있는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해서 교육을 받음. 볼로냐, 키에리, 파비아등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파도바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임명되어 신학과 철학을 가르침.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프란치스코회 총장이 될 때까지 교직을 겸임하면서 성직자 생활을 같이 병행하고 있던 로베레는 1467년 바오로2세(Paulus PP. II, 1417~1471, 재위1464~1471)로부터 추기경 서품을 받게 된다.
프란치스코회라는 청빈한 삶을 추구하는 마인드로 명망이 높았지만, 즉위후부터는 스토리가 달라지니..
교황과 족벌주의의 시작
1471년 바오로2세가 서거하면서 열린 콘클라베에서 54일만에 교황으로 선출되는데(+밀라노 공작에게 선물 투척), 212대 교황 식스토4세(Sixtus PP. IV, 1414~1484, 재위1471~1484)로서 통치가 시작된다.
청빈한 삶을 추구함으로서 명망이 높았지만 교황으로 선출되자마자 다른사람이 되어버리는데...
이때부터 성직자 매관매직, 조카를 양자로 들여 교황 최측근에 두는 족벌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식스토4세는 콘클라베이후 군중들앞에서 한 약속과는 다르게 번듯한 외모를 가진 젊은 남성을 추기경으로 임명하고, 1477년 재위6년엔 16세의 조카인 추기경 라파엘레 산소니 갈레오티 리아리오(Raffaele Sansoni Galeoti Riario, 1461~1521)와 20세의 조반니 델라 로베레(Giovanni della Rovere, 1457~1501)를 포함한 친족들을 교회의 고외직으로 앉혀놓는 기행을 벌인다.
뭐 물론 업적도 있지..
교황으로 앉아있는동안 로마를 사실상 재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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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 & 재건 | 카피톨리니 박물관(Musei Capitolini, 1471,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창립 로마시내 도로 개통 및 포장(당시 로마시내 도로의 극심한 혼잡으로 불만이 가득찬 상태에서 한 시민이 교황의 마차에 돌을 던짐으로부터 시작된 사업) 아쿠아 비르고(Aqua Virgo) 수로 복원(로마제국때 사용되던 수로, 기원전19년 아그리파에 의해 완공) 시스토 다리(Ponte Sisto, 1473~1479)건설 산타 마리아 델라 파체 성당(Santa maria della pace, 1480)건설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 Popolo, 1472~1477)재건 산타고스티노 성당(Basilica di Sant'Agostino in Campo Marzio, 1483)재건 바티칸 시스틴 예배당 복원(1473~1481, 이후에 미켈란젤로가 장식함) |
이때 당시 시민들은 도시의 복원이라 불릴 정도로 엄청난 변화를 목격했다고 한다.
스페인 절대주의 시작은 나로부터여
1478년, 식스토4세는 독실한 카톨릭 국가 스페인(아라곤+카스티야)의 공동군주이자 부부인 '카톨릭 왕' 페르난도2세(Ferdinand II, 1452~1516, 재위1479~1516)와 이사벨라1세(Isabelle Ier, 1451~1504)에게 종교 재판관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이로서 교황의 권위까지 등업은 스페인은 수만~10만여명의 사람들이 재판에 회부되고 사형을 선고하는등 엄청난 피바람과 함께 스페인은 절대주의 왕정이 시작되게 된다.
파치 음모
1478년 4월 26일 일요일 피렌체 대성당에서 미사를 들이고 있는 로렌초 데 메디치(Laurent de' Médicis, 1449~1492, 재임1469~1492)와 동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Julien de' Médicis, 1453~1478)에게 괴한이 들이닥치게 되는데, 로렌초는 부상을 입고 현장을 탈출하지만 줄리아노는 현장에서 즉사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는 피렌체 내 메디치가문의 반하는 세력인 파치 가문이 주도하여 일으킨 쿠데타였는데 이 사건의 배후에 교황 식스토4세가 간접적으로 지원했다(메디치가문과 갈등이 있었음 : 교황 식스토4세가 돈이 부족해 메디치가에 돈을 빌려달라했는데 거부당해서 빡쳤음, 이로인해 메디치가문을 몰아내고 피렌체를 교황령에 포함시키고 로렌초 데 메디치를 죽여 조카인 지롤라모 리아리오를 피렌체 군주로 임명할 계획).
반란 주모자는 식스토4세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Girolamo Riario, 1443~1488)와 프란체스코 살비아티 대주교(Francesco Salviati Riario, 1443~1478)가 있었는데, 프란체스코 대주교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피렌체 시민에 의해 효수당하면서 식스토4세 자신이 임명한 대주교가 효수당하면서 교황의 권위를 실추시켰다는 명분으로 피렌체 전체에 파문을 때린다(...).
이 대사건 이후 로렌초는 더욱 권력을 곤고히 다잡게 되고, 종교계를 장악하기 위해 자신의 둘째아들이자 미래의 교황 레오10세(Leo PP. X, 1475~1521, 재위1513~1521)를 교황청으로 보내 권력을 잡게끔 한다. 이후 1488년 지롤라모 리아리오를 암살하는데 성공.
저것도 맘에 안드네.. 치뿌라
식스토4세는 페라라 전쟁에도 개입을 했는데, 당시 페라라를 통치하던 에스테 가문 수장 에르콜레1세 데스테 공작(Hercule Ier d'Este, 1431~1505, 재위1471~1505)와 소금독점권 문제로 다투다가 식스토4세는 열이 뻗쳐서 에스테 공작령을 교황령으로 흡수시킬 명목으로 에스테가와 동맹이던 베네치아 공화국을 꼬드껴 1482년 페라라 전쟁을 일으키게 됨.
에르콜레는 나폴리, 밀라노, 원래는 적이였지만 교황하고 사이가 틀어진후 동맹이된 피렌체까지 지원을 받으면서 전투를 벌이지만 결국 굴복하고 바뇰로 조약(Le Traité de Bagnolo, 1484)으로 마무리된다(자세한 스토리는 에르콜레1세 게시물 참고.).
선종
1484년 6월 열병에 걸리고 8월에는 통풍에 걸리게 되면서 결국 10여일만에 선종.
성직 매관매직, 족벌주의 등으로 암적인 행위를 했지만, 르네상스시대(1450~1600) 시작시기의 교회 수장으로서 예술, 과학등을 후원하기도 하고 위의 표에도 정리를 했지만 도로정비, 성당건축, 복원등 여러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