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자코모 델라 키에사 Giacomo Della Chiesa
Benedictus PP. XV, 1854~1922, 재위1914~1922
출생
1854년 이탈리아 제노바 펠리(Pegli)에서 아버지 후작 주세페 델라 키에사(Marquise Giuseppe della Chiesa, 1821~1892)와 어머니 조반나 밀리오라티(Giovanna Migliorati, ?~1904)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남.
고위귀족가문인 키에사가문에서 태어났는데, 부계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교황 갈리스토2세(Callistus PP. II, ?~1124, 재위1119~1124)와 이탈리아 국왕 베렌가리오2세(Berengar II, 900~966, 재위950~961)가 나올만큼 유서깊다. 모계역시 교황 인노첸시오7세(Innocentius PP. VII, 1336~1406, 재위1404~1406)가 나온다.
배경
아버지 주세페는 아들의 사제가되는 대신에 법조인이 되었으면 하여 법대로 진학하게끔 해 1871년 제노바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해 1875년 박사학위취득후 다시 신학교에 보내달라고 아버지한테 요청해서 결국 사제의 길로 가게됨.
사제서품
1878년 로마 알모 카프라니카 대학교에 들어가있던 시기에 당시 막 즉위원년이던 레오13세(Leo PP. XIII, 1810~1903, 재위1878~1903)가 즉위하게 되는데, 이때 12월말에 자코모도 라파엘레 모나코 라 발레타 추기경(Raffaele Monaco La Valletta, 1827~1896)으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게 된다.
눈에 띄네..
1883년까지 자코모는 교황청 학술원에서 공부하게되는데, 교황청 직속기관으로서 추기경과 고위 성직자들의 학술적 검토를 매주 받으면서 레오13세의 최측근 국무원 총리(1887~1903)가 되는 추기경 마리아노 람폴라(Mariano Rampolla, 1843~1913)의 눈에 띄게되며 마리아노 추기경은 자코모를 자신의 서기로 고용하기에 이름.
1887년 마리아노 추기경이 국무원 총리에 임명되면서 자코모도 따라 국무원 서기가 되면서 마리아노의 업무를 보좌하게 된다. 이후 서기기간동안 캐롤라인제도 문제로 인한 독일과 스페인간의 협상참여, 콜레라유행으로 인한 구호활동 조직, 기획등으로 인정을 받아 1901년에 국무장관 대리인으로 임명되게 된다.
1903년 콘클라베
레오13세가 1903년 선종하게되면서, 콘클라베가 열리며 유력한 교황후보였던 마리아노 추기경을 비롯해 지롤라모 마리아 고티 추기경(Girolamo Maria Gotti, 1834~1916), 이번 콘클라베에서 선출되는 교황 주세페 멜키오레 사르토 추기경(Giuseppe Melchiorre Sarto, 1835~1914, 재위1903~1914)등이 참여하게 된다.
64명의 선거인단중 62명이 참석하는데, 역대 인단수중 가장 많은 수.
마리아노 추기경이 유력후보로서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추기경들은 레오13세의 사회정의사상을 옹호하지 않고 자기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후보를 선호하여 지롤라모 마리아 고티 추기경을 추대한 것.
1차투표는 람폴라가 1위를 차지하지만 표가 분산되어 과반(42표)에 한참미치지못해 2차, 3차투표로 가게되었는데, 3차투표가 끝나고 크라쿠프 주교인 얀 푸지나 데 코시엘 스코 추기경이 당시 마리아노 추기경을 경계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1세(François-Joseph Ier, 1830~1916, 재위1848~1916)의 명령으로 마리아노 추기경에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여 결국 후보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것으로 끝.
이후 사트로 추기경이 50표를 얻으며 교황으로 선출되며 비오10세(Pius PP. X, 1835~1914, 재위1903~1914)로 즉위하게 된다.
자코모는 마리아노 추기경과 가깝고 친밀하게 지냈던 관계 때문에 자코모는 볼로냐 주교, 대주교를 거쳐 1914년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된다.
1914년 콘클라베, 교황
1914년 초반은 이탈리아 내부적으로도 사회주의자, 왕정타도주의자, 반카톨릭주의자들의 반란으로 인해 총파업이 일어나 약탈이 자행되는등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해 8월 비오10세가 선종하면서 콘클라베가 소집되는데, 이땐 이미 1차세계대전(La Première Guerre mondiale, 1914~1918)이 진행중이였고, 새 교황의 주요 사안은 자연스레 1차대전 관련 문제일 것으로 전망되었음. 외교능력이 뛰어난 교황이 요구되던 시점.
이런차원에서 외교적 성과가 많았던 자코모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베네딕토15세(Benedictus PP. XV, 1854~1922, 재위1914~1922)로 재위에 오르게 된다.
1차대전을 '유럽의 자살행위'로 비유하며 전쟁에 단호하게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조속히 적대관계를 끝낼 것을 요청하게 된다. 1914년 크리스마스 이브보다 이른시기에 전쟁을 끝내달라는 요청을 연합국, 추축국들에 요청했으나 묵살.
교황청은 1차세계대전동안 중립을 선언하며 교전국간 평화를 중재하기위해 노력하지만 모두 중재안을 수용하지도 않지만, 유럽의 평화적 단결과 전쟁 조기 종료등을 계속해서 주장하고 요청한다.
볼셰비키 혁명과 1차대전 종료
1917년 1차대전이 진행중일때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인 볼셰비키 혁명(La révolution bolchevique, 1917)이 터지게 되면서 이에 우려를 표한 베네딕토15세는 블라디미르 레닌()정부가 벌인 반종교적 정책, 내전중 유혈사태등으로 인한 피해자들을 돕기위해 구호단을 꾸리는 등 다방면으로 피해자가 더이상 발생하지 않게끔 몸소 노력한다.
1차대전이 1918년에 종료됨과 동시에 많은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을 돕는일에 끝까지 집중하고 노력하며 몸도 돌보지 않고 움직인다.
선종
1922년 성녀 마르타 호텔에서 미사를 봉헌한 다음 자신을 태우고 갈 마부를 기다리는동안 비를 맞게 되는데, 이로 독감에 걸리게되면서 폐렴으로 더 악화되버리면서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며 67세로 선종.
1차대전을 종식시키기위해 많은 노력을 한 베네딕토15세는 2005년 베네딕토16세(Benedictus PP. XVI, 1927~2022, 재위2005~2013)가 교황으로 선출될 때 베네딕토15세의 가르침과 유산을 이어가고 싶다는 뜻에서 베네딕토로 명명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