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ie-Antoinette, 1755~1793
출생
1755년 신성로마제국 오스트리아 빈(Vienne)의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아버지 프란츠1세(François I, 1708~1765, 재위1740~1765)와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Marie-Thérèse, 1717~1780)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남.
유년시절
마리는 막내딸로서 대부분의 시간을 춤, 음악, 외모치장등에 해당하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정치쪽으로는 거리가 멀고, 당시 귀족여성들은 결혼전에 교양 교육을 많이 받음) 다른나라의 언어등을 구사할 줄을 잘 몰랐다. 10살이 되어도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등을 거의 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이 3가지 언어는 오스트리아 황실에서 줄곧 쓰이던 언어들이라. 더욱 문제가 됨(프랑스 베르사유보다도 더 엄격하고 보수적인 오스트리아 궁정)..
프랑스로 시집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Marie-Thérèse, 1717~1780)는 자녀의 결혼을 외교적으로 써먹는데, 마리가 태어나고 얼마안있다가 벌어진 7년전쟁(1756~1763)이 끝나는 상황에서 앙숙인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가 화해하면서 국경에 맞닿아있던 프로이센과 먼 영국을 견제하고자 했다. 이 결혼을 마담 드 퐁파두르(Madame de Pompadour, 1721~1764)가 나서서 문서를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보내는데, 마리아는 이를 받아들이고 프랑스측에서는 미래의 왕비교육을 위해 오를레앙 주교 베르몽을 호프부르크왕궁에 보낸다. 그래서 막내딸 마리를 1770년에 15세의 나이로, 프랑스 도팽인 '루이 드 프랑스' 미래의'루이16세'(Louis XVI, 1754~1793, 재위1774~1792)와 결혼시키기에 이른다.
1770년5월16일, 16세의 도팽 루이 드 프랑스와 15세의 마리 앙투아네트가 베르사유 궁전(Château de Versailles)에서 결혼식을 거행하게 된다.
남편
루이 드 프랑스(루이16세)는 소심하고 우유부단했지만 마리를 사랑하는데, 마리를 피하고 일찍 사냥이나 하러 다니는 모습을 보이자, 마리는 더욱이 남편의 사랑을 더 얻어내기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에서 온 이방인 취급을 당하면서, 사실상 왕따를 당하는데 오스트리아와 오랜기간동안 적대관계였던 프랑스로서, 국민적 감정의 골이 깊었음. 그 중에서도 특히 루이15세(Louis XV, 1710~1774, 재위1715~1774)의 애첩인 뒤바리 백작부인(Comtesse du Barry, 1743~1793)이 '창녀'출신이라는 것으로 경멸에가깝게 무시했다고 전해짐. 이런 이유들로 빡이친 뒤바리는 오스트리아 대사에게 외교적 압박을 가하면서 마리를 괴롭히게 됨. 오스트리아에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오빠 요제프2세(Joseph II, 1741~1790, 재위1765~1790)가 참아라고 해서 결국 참음.
1774년 루이15세가 서거하고 남편이 루이16세로 즉위하게되면서 루이는 바로 뒤바리 부인을 바로 추방시켜버린다(!).
오스트리아인으로 시달리고, 귀족들에게 왕따를 당하면서 사실상 믿고 의지할 건 남편밖에 없었다. 이런 고충을 루이16세 역시도 알고있었고, 루이는 마리에게 베르사유궁 별궁인 프띠 트리아농(Petit Trianon)을 선물로 주게 된다. 이곳에서 이방인의 외로움을 달래기위해 전원적인 분위기로 개조하고, 파티, 가면무도회등을 열며 스트레스를 해소. 근데 또 이 별궁을 호화스럽게 개조했다는 소문이 또 퍼지면서.. 골치아프게 괴롭히게 된다.
목걸이 사건
어찌저찌 마리는 조용히 별궁에서 혼자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을 가지고 잘 지내고있는데 1784년, 목걸이사건(Affaire du collier de la reine)이 터지게됨. 발단은, 잔 드 라 모트(Jeanne de la Motte, 1756~1791)로부터 시작되는데 과거로 돌아가서, 1772년 말년의 루이15세가 애첩 뒤바리부인을 위해 고가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주문하는데 1774년 루이15세가 서거하고 루이16세 즉위후 뒤바리부인이 추방되었다는 얘기를 위에서 했을 것이다. 물론 목걸이 계약은 무효로되면서 보석상이 왕비가된 마리에게 판매를 하려고하는데 거절. 이 내용을 잔 드 라 모트가 알게되면서 추기경이자 궁정사제장 루이 드 로앙(Louis René Édouard de Rohan, 1734~1803)에게 마리가 구매하는 것처럼 속여서 대리구매를 하게 시킴.
문제는, 잔이 로앙으로 받은 목걸이를 로앙이 결제를 하고(풀할부) 잔은 대신해서 마리에게 주겠다고 로앙까지 속이는데, 보석상에게도 잔금을 치루지 않은 것에... 보석상이 마리에게 고변함으로서 난리가 난다.
제대로 빡이 친 마리는 법원에 이둘을 고발해서 결백을 증명하려고 함. 결과는 잔 유죄. 마리와 무관한 일이라는게 밝혀져도 시민들은 믿지않음. 이때부터 사실상 권위추락.
대혁명
1789년 오랜기간 쌓여있던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게 되면서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데, 루이16세의 우유부단한 결정으로 삼부회에 참석한 국민의회까지 군대의 힘으로 누르게 되면서, 바스티유 습격이라는 사건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습격이후 1달뒤 8월에 봉건제 폐지, 평등, 사상의 자유등의 내용을 가지는 인권선언을 발표함으로서 정의와 이념을 세운 혁명군을 상대로 루이16세는 거부. 군대를 보냄. 계속한 거부에 변수가 생기는게, 빵값폭동으로 인한 남녀노소모두가 베르사유궁쪽으로 행진을 하게되면서 당황한 루이16세가 달래지만 이미 분노가 폭발한 민중을 막을 수가 없었음.
이후 혁명이 장기화되면서 베르사유의 귀족들도 점차 불안해지기 시작하면서 다들 해외로 도피를 하게 되는데, 이는 루이16세와 마리에게도 불안함으로 작용하게 된다. 루이16세는 해외도피자체가 불명예스러운 일이라 생각하여 계속 베르사유에 머무르는데, 마리가 오스트리아로의 망명을 계획, 남편과함께 1791년 6월20일에 계획을 실행으로 옮기게 된다. 그러나, 3일만에 발각되면서 다시 파리로 끌려오게 됨으로써 권위가 바닥까지 떨어짐.
공화정과 처형
1792년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함으로서, 루이16세는 자동 폐위가 되어 평민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때 루이16세를 가만둬야하나 말아야하나로 의회에서 썰전이 벌어지는데, 지롱드파는 공화정이라도 루이16세는 처형해선 안된다 였고, 자코뱅파는 처형을 해야한다로 나뉘게 된다.
그러나 결국 자코뱅파의 우세와 투표로 루이16세가 유죄로 판결남으로서 1793년 1월 21일 단두대로 참수형에 처하게 됨. 마리역시 남편을 따라 10월에 단두대에 처형당하게 된다.
프랑스에 시집와서 크게 튀는 행동은 하지 않았는데도, 이상한 소문들이 따라붙게되면서 현재까지도 많은이들이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사치가 심했다, 방탕했다, 빵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 라는 말을 그대로 믿는 경향이 있는데, 목걸이 사건같이 결백하다는 증거가 있고, 합스부르크왕가의 사치를 하지말라는 교육을 받았고, 더욱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이 이런 소문들로 과장된 평판이 아직도 20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어진다는 것은 문제가 많다고 봄.
객관적인 지표와 함께,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인물에 조금 더 이해를 해보길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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