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
Madame de Pompadour / Marquise de Pompadour, 1721~1764
출생
1721년 파리에서 세무관인 아버지 프랑수아 푸아송(Francois Poisson, 1684~1754)과 어머니 마들렌느 드 라 모뜨(Madeleine de la Motte)사이에서 태어남.
유아세례를 받고, 잘 지내고 있었는데, 1725년 비리사건으로 아버지가 신성로마제국으로 망명을 떠나게 되면서 집은 압류당하고 어머니또한 고통받으면서 살게되는데, 잔은 1727년 수녀원에 맡겨지면서 그곳에서 크면서 어린이들을 교육하는 선생으로 크게 됨.
이후어머니 마들렌느는 남편 프랑수아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게 되면서 여러 연인들과 사귀면서 당시에 어느정도였냐면, 잔이 친딸이 아니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사람들이 생각했을 정도..
살롱
수녀원에서 교육을 담당하면서 지적수준이 쌓여가고 특히 문학쪽책을 많이 읽었는데, 우연하게 이웃이자 어머니의 친구의 딸인 마리-테레즈 드 라 페르떼-엄보(Marie-Thérèse de La Ferté-Imbault, 1715~1791)와 문학살롱을 열게되면서 잔의 인생이 뒤바뀌게 된다. 음악교육, 예법, 춤(무도회)등을 배우면서 미술, 수학, 언어, 역사, 철학등 모든 방면의 교육을 받으면서 클라브생(하프시코드)연주와 성악실력까지 예술적 소양까지 고루 갖춘 지성인으로 성장한다.
결혼, 간택
1741년 19세가 되었을때 금융가 노르망(Charles-Guillaume Le Normant d'Étioles, 1717~1799)과 결혼하게 되는데, 첫째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당해에 사망하고, 둘째 딸 알렉산드린(Alexandrine Le Normant d'Étiolles, 1744~1754)마저도 10살을 넘기지못하고 사망.
1745년 루이15세(Louis XV, 1710~1774, 재위1715~1774)와의 첫만남이 이루어지는데, 1744년에 루이15세의 공식 정부였던 샤토르 공작부인 마리 안 드 마이-넬(Marie Anne de Mailly-Nesle, Duchesse de Châteauroux, 1717~1744)이 사망하면서 슬픔에 잠겨있던 루이15세가 베르사유궁 근방 사냥터에 사냥을 나왔다가 우연히 퐁파두르를 보게 됨. 이후 정식으로 도팽 루이 페르디낭(Dauphin Louis ferdinand, 1729~1765)의 배우자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 데스파뉴(Marie-Thérèse-Antoinette-Raphaëlle d'Espagne, 1726~1746)와의 결혼식(1745년 결혼)을 축하하는 무도회에서 만나게 되면서 담소를 나누고 이때부터 역사가 시작된다.
이후 공식적으로 1745년 하반기에 정식으로 소개를 거쳐 정부가 됨.
홀린다 홀려..
이미 프로필그림만 봐서알겠지만, 외모는 당대의 최상위급에 지식과 교양, 예절까지 갖춘 퐁파두르로서 아주그냥 루이15세가 가장 아끼는 애첩이 됨. 이런 퐁파두르를 도팽 루이 페르디낭(Dauphin Louis Ferdinand, 1729~1765)을 포함한 루이15세의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Marie Leszczyńska, 1703~1768)역시 좋게보지 않았는데, 창녀, 부르주아 출신등의 좋지않은 놀림의 표현들이 오가면서 상처를 받는데, 더욱 교양있는 여인의 이미지를 구축하게 됨.
정치, 7년전쟁
대충 루이15세가 정무를 보지 않던 1749년부터 퐁파두르가 사망한 1764년까지 15년간의 기간동안 그녀가 정치에 참여하면서 사실상 왕 위에 군림하여 통치하는 여인으로서 유럽에 명성이 자자했다.
이 예시는, 1756년에 발발한 유럽대전 7년전쟁(1756~1763)에 프리드리히 2세(Frédéric II 'le Grand', 1712~1786, 재위1740~1786)를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와 교류하면서 포위를 하게되면서 프리드리히는 위기를 겪게 됨..[오스트리아의 마리아-테레지아 여왕(Marie-Thérèse d'Autriche, 1717~1780, 재위1740~1780)과 러시아의 예카테리나2세(Catherine II, 1729~1796, 재위1762~1796)과 손잡아 프리드리히를 고립시킨 것을 유럽의 세 여자가 프로이센을 치다 라는 표현으로 알려져 있음]
예술
살롱에서부터 축적된 예술적 감각과 안목까지 이때 제대로 발휘하게 되는데, 살롱에 당대의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 몽테스키외등과 토론을 하고, 화가쪽은 수많은 화가들이 퐁파두르로부터 후원을 받게 된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 이 시대가 사실상 로코코 양식(1725~1800)이 가장 급속도로 발달한 시기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죽음
갑작스럽게 1764년에 폐결핵으로 사망하게되면서, 사랑했던 애첩을 잃은 루이15세가 매우 비통해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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