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mand Jean du Plessis, cardinal-duc de Richelieu(1585~1642)
출생
1585년 파리에서 아버지 프랑수아 뒤 플레시스 드 리슐리외(François IV du Plessis de Richelieu, 1548~1590)와 어머니 수잔느 드 라 포트(Suzanne de la Porte, 1551~1616)사이에서 태어남. 아버지는 프랑스 서부의 하급귀족가문인 플레시스 가문의 영주로서 앙리3세(Henri III, 1551~1589, 재위1574~1589)의 행정관, 어머니는 고등법원 법관의 딸로서 엄친아로서 자라나게 됨.
어린시절..어린시절
아버지 프랑수아가 1590년에 사망하면서(리슐리외는 당시 5세) 가세가 기울게 되면서 성직자의 길을 가게 된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어릴적부터 머리가 비상하고, 군사, 외교쪽으로 관심이 많았다고는 하는데 이후 이 관심이 그의 인생 자체가 되어버릴줄 누가 알았겠는가?
성직자의 길로
1605년(20세)에 소르본 대학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시작하여 2년만에 박사학위(신학)를 취득한 다음 당시 교황 바오로5세(Paulus PP. V, 1550~1621, 재위1605~1621)로부터 무려 주교로 서품을 받게 됨(사제 이후 서품되는 계급이 주교).
정계로?
1607년 뤼송 교구의 주교로 임명되어있었는데, 1614년경 당시 앙리4세(Henri IV, 1553~1610, 재위1589~1610)의 왕비이자 루이13세(Louis XIII, 1601~1643, 재위1610~1643)의 섭정이였던 마리 드 메디시스(Marie de Medicis, 1575~1642)의 눈에 들어서 왕실 고문관으로 발탁됨과 동시에 삼부회를 개최시켜, 아들 루이13세와 스페인 공주 안 도트리슈(Anne d'Autriche, 1601~1666)의 결혼문제, 외교문제들을 논하는 자리에 앉혀 지휘하게 시킴. 이후 여러 능력을 인정받아 마리의 눈에 들게되면서 왕실에 들어가게 되면서 정치 커리어가 시작됨.
워낙에 사이가 나빴던 루이13세와 마리 드 메디시스로서, 결국은 루이13세가 1617년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를 몰아내고 동시에 리슐리외도 쫓겨나지만, 마리의 부름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이후 루이13세와 마리를 화해시키는 것도 리슐리외의 몫이였다. 이 화해로 인해 루이13세도 리슐리외를 중용하게되면서, 이후 리슐리외를 신임하게되면서 환상의 콤비의 시작이 지금부터..
환상의 콤비
처음에는 어머니쪽의 세력이고 하여 화해하는겸 중용하여 써서 그다지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마리 드 메디시스가 끝없는 권력욕의 욕망으로 자기편에서 아들 루이13세의 측근이 된 리슐리외를 제거하려던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게 되면서 루이13세가 이후로부터는 그냥 최측근으로서 리슐리외를 더욱 아끼게 되는 계기가 됨. 근데 이걸로 끝이 아니고 마리는 둘째아들 가스통 드 프랑스(Gaston de France, 1608~1660)과 함께 다시 내전을 일으키는데.. 이미 저번 음모의 실패로 해외로 도주한 뒤로 국내세력이 없던 마리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그냥 그대로 다시 추방당하게 됨. 마리는 이후1642년 죽을때까지 해외를 떠돌다가 생을 마감하게 됨(죽을때까지 권력욕을 버리지 못하고, 원망만 하다가 사망).
진정한 2인자
루이13세는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로 인한 혼란을 겪고난 뒤 왕권의 강화와 더불어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여 강한 프랑스를 만드는 게 목표가 되었는데, 리슐리외 또한 이 목표와 같은 마인드여서 둘의 목표가 같게 되면서 더욱 시너지가 나게 되는데.. 이게 뭐냐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질서인 왕권신수설을 정당화 시키면서 절대적 권력의 전제군주중심의 국가운영을 뜻하는 것. 앞에서 언급되었던 삼부회(제1,2,3계급이 모여 국정을 논하는자리)가 1614년을 마지막으로 1789년 다시열리기까지 무려175년동안 열리지 않게 된다(사실상 절대왕정이라는 뜻)
귀족과 지방호족(어...? 고려때 생각나네) 등의 세력도 약화시키는 계획을 하면서 왕명으로 파견된 장관을 통해서 지방행정을 감시, 감독하게 하면서 지방권력을 원천차단하는 효과를 이루게 되면서 점점 왕권이 강화되는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라로셸 공성전
처음에 위그노에 대해 온건적으로 대했던 리슐리외지만, 잉글랜드같은 위그노국가와 손을 잡고 연대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정책이 180도 바뀌게 됨. 이후 위그노들이 수도를 떠나 농성을 시작한 곳이 프랑스 서부 라 로셸(La rochelle)이다. 1627년부터 정부군이 공격을 시작해서, 알아서 문을 열고나오게끔 포위를 하고 사실상 메말라죽이는 작전을 쓰게 되는데, 결국 1년만에 항복하게 되면서 항복한 위그노들은 살려주면서 신앙의 자유는 인정하지만, 국가에 기용되는(과거시험을 통해 등용되는)특권은 박탈.
30년 전쟁
리슐리외 특유의 행정능력중에서도 외교능력은 당시 유럽 최고수준이였는데, 유럽국가간의 종교전쟁인 30년전쟁(1618~1648)에 뛰어들게 되는데, 유럽국가간 세력균형을 맞추는게 목적이였던 리슐리외는 국가간의 권력구도를 잘 파악하여 저울질을 잘 하여 발을 넣을때, 뺄때를 잘 파악하면서 전쟁에 직접적인 참가(나중에 보상받기 좋게끔 하는 명분)와 동시에 당시 유럽의 패자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동시에 프랑스의 영토확장(알자스, 로렌)에 기여하게 되면서 실로 리슐리외의 외교능력이 크게 발휘되면서 더욱이 루이13세의 권력까지 강화되는 효과까지 불어일으키게 된다.
사망
1642년 루이13세와 함께 스페인쪽 세력제압을 위해 같이 동행했다가(당시 나름 고령인 57세) 병에 걸리게 되면서 당해에 사망하게 됨. 이 리슐리외의 정책을 이후 마자랭 추기경(Jules mazarin, 1602~1661)이 그대로 계승하게 되면서 루이13세의 아들이자 다음 계승자인 루이14세(Louis XIV, 1638~1715, 재위1643~1715)의 절대주의를 더욱 강력하게 전달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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